소나무들로 이루어져 왠지 쓸쓸한 온도를 풍기는, 낮은 지형의 뒷산들이 병풍처럼 굽이 보는 가운데, 아파트 단지들의 행렬이 저지대에 드문드문 형성되어 있다. 드높은 곳에서 푸른 빛깔로 유영하는 하늘의 빛깔은, 미적거리는 저온과 함께 휘몰아치는 바람에 의해 한층 그 투명함이 지상으로까지 전달되었다. 내게는 이러한 전경이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바야흐로 가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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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의 창에는 지긋한 관록을 심어주는 바랜 햇살이 어느 찰나에 비스듬히 투과한다. 희색과 하얀색이 전체적으로 섞여 둔탁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나뉨이, 어떤 반영의 그림자를 그리듯 기내에 쓸쓸한 수채화를 소묘한다. 이러한 인식은 빛바랜 과거의 연상과 같은 것이다. 마치 플라이미드 필름으로 나의 과거사를 찍어, 현상해 널어놓은 갈색 사진을 자조하여 바라보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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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순간들, 시공이 연계되는 임계점의 연쇄는 알 수 없게 관조하는 초연한 순간들을 의식 안에서 빚어낸다. 풍경과 풍경의 이음새가 형용할 수 없는 정신현상, 이를테면 반추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지고 감수성의 떨림이 일정한 이미지로 설계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건 자연적인 현상에 다름없다. 최소한 나의 지각에 있어서는 부지불식간 스스로 그러하다.

   이윽고 산 밑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필라멘트들의 노란 행렬이 양쪽에서 가차 없이 다가오며 어둠 속에서 긴장을 형성할 때, 아직까지도 마모되지 않는 시간의 사슬을 알아차린다. 기억과 기억이 이어져 있는 것, 그것은 한 개인의 역사성으로서의 시간성이, 현재로서의 뚜렷한 지적 인식 없이 한없이 흘러가, 꼭 한 가닥 가느다란 희망도 좌절도 없는 초연한 가운데서, 주체할 수 없는 삶의 통시성으로서의(혹은 과정으로서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바를 소급이라고 부르면 소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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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이 역사(驛社)를 떠나 행군하고 있는 모습이 아랑곳하다. 그러나 버스는 순식간에 그 기계적인 율동을 흘려보내고, 또다시 시골풍광으로 들어간다. 아스팔트의 끝물에 서있는 인공적인 울타리들 안에 펼쳐진 도랑과 석간수(石間水), 수맥의 힘을 받은 기다란 수풀이며 이들의 모습을 희 번득거리게 하는 유난한 가을햇빛과 이 주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일상적인 느림 같은 것이 창가에 비친다. 나는 서글프기도 했다가 이내 자신의 삶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나의 청춘을 양주에서 불사른 것과 이곳에서 보낸 지난 칠년이 부질없지만 그럼에도 유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격적으로 문인으로 살아가마고 다짐한지 딱 그만큼이 흘렀다. 무진하게 살아온 세월이 덧없는 인생 속으로 미끄러져 청운을 지향하는 것은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예도(藝道)의 층위로서 글쓰기에 스며든 대의의 칼날은 더욱 시퍼레졌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진정 감수성의 영역인 것이다. 고결함의 영역은 굳이 표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어떻게든 타자로서 뻗어나가지 않고 온전한 동일자로서, 즉 존재자 안에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는 향기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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