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월드북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소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고 오마주 형식으로 적습니다.

열차를 인식하는 의식의 의식, 그것이 자아(ego)이다.

- 사르트르 문예작품 구토중에서

가 나 자신에게 자신 있고’ ‘정당하다고 여겨질 때’,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확신이 서는 지점에서 [대타존재로서의 실존]을 구성하리라. 여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의 스승 사르트르부터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사상에서 세 가지 기법을 사용한다. [즉자], [대자], [대타]. 지극히 헤겔적인 기법이다. “즉자는 사물(아주 깊이 있는 대명사이니 유의해주시길.)의 무의식성과 사물 자체를 말함과 동시에 인간존재에게 이용당하거나, 깨어난 지식인이 아닌 남에게 억압받는 모자란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비반상적이고 선택권이 없고’, ‘무의미하고 그냥 물활론적인 개념이다. 이에 반해 대자란 영문법의 자동사에서 만 떼어놓고 생각해보자. 자동사는 자기 자체가 기능을 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란 반성적이고 자유의지가 엄존하며, 대오각성의 인간, 요해하는 인간임과 더불어 노에마를 다루는 노에시스가 있는 인간이다. 각론을 모아 총론을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 지해를 생성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에 반해 대타는 타동사를 합성하면 된다. 타동사는 보어에 의존한다. 타인이나 타자他者에게 의지하는 습성이 있음이니, 이야말로 전체지에 가까운 연대주의적, 사회주의적인 것,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나타내는 세계지혜의 휴머니즘에 가까울 것이다.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언어도 있지만, 언어(유희)철학적인 저자로 말미암아 언어에서 언어로 연원하는 글쓰기가 있다. 선형적인 논변은 무한분할의 연속을 가져오고, 본디 사유가 아무리 설왕설래한들 담아내는 그릇은 제한적이니 사상가로서는 철학적 글쓰기에 파생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신의 사변을 논리로써 담아낼 때에, 우리는 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가령 글쓰기는 모두가 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것이 초심에서부터의 불이탈적인 철학적 글쓰기이고, 파생의 파생이라는 계열로 침잠하는 재인적 계기가 아닌 외화적인 계기, 각각의 다채로운 노에마(대상, 관념, 과정, 본질, 기억으로서의=사물과 유사한 독일어 현대철학의 최근류 개념이다, 즉 지시되는 대상)가 노에시스(지향하는 작용)에 의해 돌연 언어연쇄로 풀이되는 것, 따라서 우리는 의식의 의식이 만일 자아라는 사르트르적 개념을 선이해로 점철·상정한다면, 이 철학적 글쓰기, 부정과 비판으로부터 야기된(경외로부터 말미암은 게 아닌) 이 글쓰기를 모범적인 전범으로 밀어붙일 칸트적 당위를 재개할 수 있으리라. 바로 거기에 불을 지펴야 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을 철학소설이라고 알튀세는 말했다. 반면 어떤 엄격한 교사는 사르트르의 철학이 언어유희의 극점에 다다랐다고 칭송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동전의 양면을 판단해야 하는가? 과연 사유에서 비롯되는 글쓰기가 아닌, 논변적 글쓰기에서 비롯되는 언어판단을 우리가 표상의 기점으로 확보해야 할 개시적인 열정을 거기에 밀어 넣을 수 있을까? 여기에 로크적 변별이 개입된다. 사물의 음영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포착하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르트르식 글쓰기의 일장일단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사르트르는 자신이 쓴 글을 수정도 안 하고 한 번 작성하면 다시는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각성제를 송두리째 복용하고 미친 듯이 언어의 극단에 이르려는 언어모험의 철학자라해도 무변한 사실이자 정론에 가까우리라.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의 사상을 진실 되게 존중하지 않았다는 점이 진짜라면, 또한 그의 사생활이 추잡한 인간으로 평판이 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은 깊지도 않고 그저 언어의 돌림과 폭발적인 공전에만 신경 쓰는 점이 없지 않은바 주지하다시피 그를 기교의 철학자라고 판단해야 하는 근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사르트르가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마지막에는 파산에 이르러 노벨문학상 거절에 대한 걸 파기하고 다시 노벨위원회에 100만 달러(지금 시세로 환원해서)를 요청했다는 소문. 그가 메를로-퐁티나 카뮈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과의 대화보다는 여자들과의 농담을 즐겼다는 소문. 철학자라는 사람이 매일 마다 엄청난 양의 위스키를 마셨다는 것, 스탈린 치하에서 망명해온 스탈린 정체政體 비판 작가 이반 데니소비치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 붙여 역사의 가지성의 오류를 범했다는 점, 20세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수사가 붙어있음에도 불타는 난봉꾼이자 진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보자. “카뮈와 함께 옳기보다는 나와 함께 틀리는 게 더 좋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진정 진과 오를 구분하지 못하고 공과 사에 통일성이 없는 추잡한 인간에 불과한가? 나는 그의 철학서적 존재와 무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위대한 철학책이라는 데 이견이 없음을, 학계에서 정론적으로 판단된 바를 비틀기는 싫다. 나는 따지기 좋아하는 투사의 기질이 있지만,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거장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를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존재와 무는 얼마나 광채로 넘치는 소설인가. 주석과 원전까지 단다면 a5크기의 책이 1800페이지는 족히 될 것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도 그의 방대한 체계를 보여준다. a5용지에 2300페이지라니, 어떻게 이렇게 일관된 철학체계를 이렇게 장대한 데이터로 풀어쓸 수 있는가? 더군다나 프랑스의 지적 전통인 철학서의 문학적 기법까지 활용해서 말이다. 또한 그의 첫 저서 구토는 얼마나 혁명적인가? 역사 이례 그런 소설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그런 아방가르드성을 가진 소설은 지금은 찾기 쉬워도, 그 당시에서는 획기적이고 소설 자체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 美石, 사르트르만 수년을 연구한 사람이다. 다른 우물을 팠을지언정 사르트르를 대학에서는 아니지만 엄연히 독자적으로 전공했다고 자긍과 자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사르트르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헤겔, 키에르키고르,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등을 묘파해야 한다. 최소한 현상학과 존재론의 표면까지는 접근해야 사르트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각설하자면, 사르트르라는 인간은 어찌하여 존재의 본질을 관통하는 언어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거기에 어떤 합목적성이나 개연성이 엄존하는 걸까? 사르트르는 거인인가 얼간이인가? 이 이분법의 양자택일에서 나는 이율배반을 일으켜야 할 것인가 배리를 강림시켜야 할 것인가? 나 또한 사르트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유보다는 언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일단 흰 종이가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서 계속해서 미친 듯이 써내려갈 수 있다. 이 점이 내가 사르트르와 통시적인 연루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내가 탐구해왔던 건 언제나 그렇듯 실존주의였다. 실존주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었다. 인간존재의 실존, 즉 현존재의 현전, 대자적 동태로 닦달음치는 심층적인 구조성의 본질적 열정!

글은 비판에서 시작되었지만 나는 그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려고 한다. 그의 언어적인 천재성 말이다. 또 하이데가가 자신의 존재론을 실존주의가 아니라고 상정했듯 나 역시 실존주의의 교황은 사르트르 한 사람 이외에 그 어떤 지식인도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단순히 피투성에, 이를테면 현상계의 유동에 무너져버리는 소인배가 아닌 군자로서의, 과거와 현재를 분쇄하고 미래를 향한 열정적인 기투! 우리가 존속(존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래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미래라는 3차원적인 시간성의 막단에서 우리는 총체적인 일단을 구비해야 하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는 희망을 인류 최고의 가치로 정립한다. 우리는 지금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 짧고 예술 영원하다고 하지만, 현대의학으로 인간은 정상적인 정신상태로, 가령 학자로 치자면 100살까지 자신의 저술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다. 수의적 확률론의 퍼스펙티브로 보아도 우리는 분명 사고사로 죽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인간은 그리 쉽게 죽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정말 질기기도 질기다는 걸 난 경험을 통해서 안다. 로크처럼.

난 아직도 변증법적 유물론이 여명기에 들어서있다고 확신하거니와 이 거대한 지적 전통은 우리의 투쟁으로, 또 그 후학의 투쟁으로 계급의 순환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마지막에는 모두를 평등하게 만듦을 우리는 목격할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르트르가 극좌파의 대부로서 學史에서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는 사실상 변증법적 유물론의 제창자였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읽어봐라. 여기에는 극한의 휴머니즘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평등과 자주성, 자유와 원활한 재화의 분배라고 부른다.

나는 내 삶에서 사르트르 스승님을 결단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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