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감탄을 했다. 그것은 조정래의 대하소설의 성공 때문이 아니다. 그의 책 한 권이라도 안 읽은 국민은 얼마 안 되고 그의 명성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므로. 또한 그의 자기희생적 글쓰기 분투기도 아니다. 그것 역시 간간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놀라게 하고 그를 존경하고 싶도록 만들며, 황홀하게 한 것은 그의 유창한 문체에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을 표현 문체론 관점에서 보면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글을 나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의 글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듯이 리듬이 있다. 주르륵 주르륵 이쪽에서 저쪽으로, 문장과 문장의 이어짐이 시소를 타듯이 경쾌하다. 또한 단어의 쓰임이 평범한데도 바로 옆에서 말하듯이 유창하다.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도 그 느낌은 길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이런 글은 우연히 나오지는 않는다고 본다. 문학에 전력질주 해온 ‘문학 인생 40년’의 내공의 힘일 것이다. 산더미 같이 쌓인, 그가 써온 원고지를 찍은 사진을 보라. 자기 키 만큼 쌓인 원고의 높이가 주옥같은 글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
수십 년을 용광로에서 달고 달으면서 힘을 얻고 살이 붙으면서 생명력을 얻은 그의 글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 집중력이 즐겁고 감탄하게 하는 좋은 글을 만들고 시공을 초월하여 읽히는 명작을 탄생 시킨 것이다.
그의 대하 장편 소설 중 나에게는 <태백산맥>이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 먼저 나온 이 작품이 아직도 나에게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다. 그것은 단지 그 책을 두 번이나 읽은 이유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그 뒤에 나온 <아리랑>과 <한강>도 수작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의 작품보다 좀 구성이 느슨해지고 캐릭터 묘사가 덜했다는 느낌이 든다. “‘대하소설은 뒤로 갈수록 지루해진다.’라는 것이 대하소설의 정설이다.”(247쪽)처럼 긴 소설을 많이 쓰다 보니 그렇지 않나 짐작해 본다. (이 리뷰를 <황홀한 글감옥>을 중간 정도 읽고 썼는데, 이 책 뒤편에 보니 <아리랑>이 <태백산맥> 뒤진다는 평을 들을 까봐 좌불안석 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의 말대로 도서관이나 대여점에 있는 <태백산맥>은 걸레가 될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읽혀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각 대학 도서관에서 대출 1위가 이 책이라고 했었다. 너무 유명세를 타다보니까 극우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 책의 저자가 생생한 현장 취재에 의해 쓰인 소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책도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태백산맥 그 현장을 찾아서>일 것이다.
물태우 시절 이름 석 자 알지 못하게 성씨를 제외하고 동그라미로 표시되었던 월북 작가들이 해금 되었다. 당연히 그들의 작품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동광출판사의 <임걱정>, 백석, 오장환, 임화의 시 등이 대표적이다. 또 이 책에도 언급되었지만 빨치산 문학이라 하여 이태의 <남부군> 등 그 아류의 책이 나왔다. 이병주의 <지리산>도 한 몫을 했다.
이 시기에 설렘 속에서 <지리산>,<남부군>을 통해서 빨치산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즉 철저한 반공 교육 탓에 머리에 뿔난 괴물로 알았던 빨치산의 실체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가족이 있고 삶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 보다 한 시대를 더 치열하게 풍미했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는 매우 진지한 삶을 사는 자들로 인식하게 되었다.
<태백산맥>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나름대로 판단해 보면, 저자의 뚜렷하고 확연하며 창의적인 개성적 인물의 창조와 수련한 문체, 민족적 불행인 분단의 현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요소가 한 몫 했다고 본다.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의 깡패 정치가 이 책의 뜨거운 반응에 상승 작용을 했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말 한 마디 잘못 해도 잡혀가 갖은 고초를 겪던 시절에, 절대 금기 사항을 치고 나갔으니, <태백산맥>은 역사적 진실에 목마른 독자가 찾게 되어 있었다. 당시에 우리 민족의 불행의 속살을, 남과 북을 동등한 입장에서 다루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도 지들만 군대 갔다 온 것으로 착각하여 생뚱맞게 색안경 쓰고, 군복 차림으로 설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로 부터도 상당한 압력을 받았으리라.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저는 그들의 공갈 협박에 맞서 맞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262쪽)
거듭 말하지만, 조정래의 글은 ‘아주 찰지고 졸깃졸깃하다’. 구수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주는 전라도 사투리는 그의 작품을 읽을수록 정감이 간다. 독자의 몸에 착착 감기며, 때로는 분노하게, 때로는 껄껄 웃도록 조정래는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을 몰아간다.
조정래의 성공은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파지를 몇 장씩 내도 문장이 마음먹은 대로 엮이지 않습니다.”(244쪽) “문장 하나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한나절이 흘러가버린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255쪽) 그렇다. 그의 작품은 뼈를 깎는 인고의 산물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좋은 글을 쓰는 방법도 넌지시 훈수를 둔다.“ 글을 문난하게 잘 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글을 물 흐르듯이, 그러면서 의미가 깊도록 쓰고 싶으면 많은 책을, 정신 모아, 유심히 읽는 습관을 들이십시오.”(297쪽)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시 그의 대하소설로 겨울을 보내는 독자들이 많아 질 것같다. 이 <황홀한 글 감옥>을 읽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