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의 방법
유종호 지음 / 삶과꿈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어느 사람이, 시를 읽는 것은 우주를 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시가 얼마나 굉장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 본다.  얼마나 시가 주는 울림이 크면 그런 엄청난 비유를 했을까. 나에게 시는, 도통 모를 소리를 비비 틀고, 남이 안 쓰는 표현으로, 읽는 사람의 수고만 더 하는 것으로 여겨 왔었다. 의식적으로, 시를 주체적으로 읽지 않았다. 어떤 필요에 의해서, 요령부득해서, 남이 요약해 놓고 낱낱이 칼질해 엮은 텍스트를 읽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시가 산문보다 대하기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시인이 몇 번의 연금술로 다듬어 태어난 언어의 결정체인 시는 쉽게 근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왜 그렇게 비교적 짧은  형식에 여러 장치를 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시인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확연하게, 충격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한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언감생심 나는 흉내도 못 낼 정도로 조숙하고 적극적이다. 그들은 중학교 때 벌써, 필이 오는 시를 발견하여 읽느라 서점의 서가를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하니 놀랄 수밖에.

 누구는 시인은 귀족이고 산문을 창작하는 자는 평민이라고 했다.  시인은 태어나지 만들어지지 않으며, 산문을 쓰는 자는 어느 정도 자기 연마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한다.   돌려 말하면, 시를 읽는 자는 명석하고 산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진다는 말인지? 어디서 보니, 시인은 초반에 왕성해서 중년의 나이가 되면 쇠퇴한다고 한다.  위의 내용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쉽게 일반화 될 수는 없다고 본다.

  명석한 측에 들기 위하여 서든, 아니면 타성에 젖은 시 감상법에서 벗어나려는 뜻에서건, 이런 저런 이유로 시를 공부해 보기로 했다.  그대서 우주를 대면하듯이, 귀족들이 궁싯거리며 고통스럽게 쏟아 놓는 언어의 마력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래서 집어들은 책이 유종호 교수의 <시란 무엇인가>이고 동 저자의 <시 읽기의 방법> 이후 두 번째이다. 유교수는 우선 서문에서 나쁜 시를 골라내는 법을 알려준다.
“남의 흉내를 냈다든지, 상투적인 생각이나 표현이 많다든지, 절제나 균형감 없이 군말이 많다든지, 지나치게 조작적이라든지, 어휘 구사상의 적정석이 없다든지 한 시를 서투르거나 빈약한 시로 본다.”(5쪽)

 그러면 시 읽기란 무엇인가? 저자는 “훌륭한 문학 작품은 크건 작건 사람살이와 세상에 대한 독자적인 발견을 보여주고 있고 또 언어적 세목에서 새로운 발명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알아차리고 공감하고 감탄하는 것이 독자의 소임이다.”라고 말한다.

두엄                                  


문명과 나의 관계는 시큰둥하고 권태롭다.
그래도 결별은 없다.
자동차, 컴퓨터, 휴대폰, 그 광고들의 난리 속에서
내 피난처는 무심,
그래도 피로와 적의 속에서 늙는다.
어제는 턱수염의 흰 수염이 부쩍 늘어난 걸 발견했다.
이건 자연의 妙用이고 日月이 흘러간다는 증거이며
내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중략)
우두벌의 그 아지랑이,
이웃집 바보처녀에도
두엄 냄새 속에서 괜히 침을 흘리며
한적한 마을을 낮도깨비처럼 실실 웃고 돌아다니던----  (최승호)

22행으로 된 비교적 느슨한 구성의 작품으로 생각의 흐름을 자유롭게 적고 있다.(252쪽)  어느 정도 시의 흐름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마지막 대목이 읽혀지지 않을 수 있다. 왜 이웃집 바보 처녀는 침을 흘리며 실실 웃고 돌아다니나?
 저자는 이렇게 풀이하여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시골 소음이나 마을에서 성장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경험했던 그림이다. 가족 비밀의 은폐가 불가능한 정황이었고 그래서 봄날 같은 때 낮도깨비처럼 실실 웃으며 마을을 쏘다니는 좀 모자란 처녀아이는 한 동네에 하나 정도는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254쪽)
 어느 마을이든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도 서투루지만 마을에 편입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갔는데 요즘은 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큰 문제없이 그들과의 추억이 그립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

고교 문학 책에도 많이 등장하는 시이다. 그런데 이 시인이 짧은 생애로 요절하고 그의 시도 과작(寡作)에 시집 한 권 펴낸 바 없다. 이 <해바리기의 비명> 달랑 한편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이 시는 자기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한다. 그만큼 치열하게 꿈꾸면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 함이라. 해바라기의 노란 색처럼 힘 있게 열심히 정열적인 삶을 노래한 것이다.  노란 색을 가장 많이 쓴 화가는 고흐다. “서른을 경우 넘기고 세상을 뜬 함형수는 반 고흐처럼 정신 착란을 일으켰었다 한다.”(97쪽) 노오란 해바라기처럼 정열적으로 살다간 시인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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