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추리 소설의 배경으로 현대 보다는 몇 세기 전의 시대물이 더 흥미진진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동일한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라면 모르지만, 소설에서는 상대적으로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야 스토리텔링이 진지하고 구성도 탄탄해 질 것이다. 즉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지나친 과학의 발전은 추리 소설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요즘 T.V 에서 많이 나오는 과학 수사 극을 보더라도, 머리카락 한 가닥이면 범인을 알 수 있으니 소설로 쓰여 진다면 얼마나 싱겁게 느껴지겠나. 미야베의 엄청 두꺼운 『모방범』을 일본 출장길에 흥미 있게 읽으면서 보낸 적이 있다. 약간 술에 취해서도 긴박하고 섬세한 내용이 궁금하여 호텔 침대에서 읽은 것이다. 장정일이, 그의 작가 동료와 중국 여행길에서, 만리장성 일정을 취소하고 혼자 호텔에서 읽은 수준 높은 책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미야베의 소설이 그렇듯이 이 책도 어떤 사건을 단순히 해결하려는 본격 추리물이 아니라 따스한 인정과 사악함이 교차되는 시대물이다. 에도 시대 시코쿠의 작은 마을, 마루미 번에서 일어나는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미신, 조작과 은폐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바보라고 ‘호’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악령이 산다고 하는 ‘마른 폭포 저택’에서 고용살이를 하는데 여기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언로(言路)가 막혀있던 시절이라 소문이 소문을 낳고 확대 재생산되어 평화로운 마을을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가당찮은 ‘번의 존속을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소수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조직의 비리가 미야베 여사의 수려한 문체로 전개된다. 미야베 여사의 매니아들은 이미 읽어 보았겠지만 만약 아직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빨리 하권을 해치우고, 『낙원』이 재미있다고 하는데 술을 줄이고 시간을 확보해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