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자기 고백형인 서술형의 긴 소설을 읽었다. 호소하고 설득하는 듯한 작중인물의 목소리는 우울하면서도 슬프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이‘인종 차별’이라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유색 인종의 고단한 삶을 힘들게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을 잘 나타낸다. 한 편으로는, 인간의 삶 자체가 불안전하고 끝없이 회의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존재론적 고민까지 느끼게 한다.

저자가 한국 이름인데 번역자가 있다. 그렇다 저자는 이민 1.5세다. 고학력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이라는 나라로 세 살 때 이민 간 저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의 프로필과 연관하여 자전적 소설인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그의 언행으로 볼 때, 대통령 당선자는 영어를 더 중시하는 정책을 펼 것으로 본다. 국어도 영어로 가르치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전형적인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고, 뭐라고 평가하기가 겁난다. 아무튼 영어는 우리에게 권력이요, 아킬레스건이다. 이 글에도 주인공이자 작중화자인 헨리 박은 완벽한 ‘네이티브 스피커’(원제목)가 되기 위해서 고전분투 한다. 한국 최고의 대학을 나온 아버지가 식료품 가게를 하면서 콩글리쉬 밖에 못하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발음 잘하려고 해도 원어민과 차이가 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절망한다.

선진국 이민이 붐을 이룰 때, 우리나라에서 공무원 하는 것보다 뉴질랜드가서 양털 자르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이민의 대열에 끼게 되었는데, 특히 우리나가 구제금융을 받던 때가 피크였을 것으로 기억된다.

 새삼스럽게 이런 슬픈 삽화를 왜 끄집어 내냐 하면, 이 소설에서는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척박하다고 여겨지는 고국을 등지고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그들은 잘 살고 있을까. 그들과 같이 동해한 아이들은, 또 현지에서 태어난 2세들은 잘 적응하고 있을까. 헨리 박과 같이 주변인이자 경계인으로 자의식 속에 빠져 부정하고 회의하고나 있지 않을까. 그들이 늦은 나이에 영어가 딸려 집 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헨리 박의 어머니 같이 이웃에 필요한 것을 빌리러 가기보다는 그냥 체념하지는 않는 것인가.

헨리 박의 유년 시절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생활에서 유색 인종이라는 놀림에 주눅이 들어 살았다. 그러다보니 매사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이것도 저것도 확실하지 않은 경계인으로서 겉도는 생활을 해 온 것이다. 또한 그의 부친은 그가 본받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완고하고 유교적이며 강압적인 그의 부모에게 불만이 많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는 전형적인 아버지 상이라도 미국식 생활에 익숙해진 gps리 박에게는 하나하나가 압력이고 폭력이었을 것이다.

백인 여성과 결혼한 헨리 박은 탐정 비슷한 스파이 짓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백인 여성 릴리아와의 결혼을 완고한 그의 부친이 허락하고 더욱이 반기었다는 것이다. 백인에 대한 동경과 열등의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밋의 죽음으로 별거에 들어가는 파국을 맞는다.  아버지의 불만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존강이라는 한국교포를 추종하는 헨리 박. 그는 얼마나 더 만족한 미국 시민으로 편입되어 갈까.

진지하고 거침없이 서술해 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아들이 고국의 언어를 결코 배우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생각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애가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하나의 감각 소리로 이루어진 삶. 그래야만 아이의 반은 노란색인 넓적한 얼굴로는 얻을 수 없는 권위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몰론 이것은 동화주의적 감상이며, 나 자신과 이 땅의 추하고 또 반은 맹목적인 로맨스의 일부이기도하다.”( 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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