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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바리는 초자연적 신의 경지에 이르러 사자와도 대화를 나눈다. 즉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의 샤먼과 비슷하다. 시대적 배경은 김일성이 사망할 때이니 1990년도 중반 쯤 된다. 주인공 바리의 파란만장한 삶은 북한의 청진과 무산에서 중국으로, 또 영국으로 말 그대로 글러 벌 커뮤니티로 확대해 나간다.
황석영과 이문열은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쌍두마차요 양대 산맥이다. 황석영은 좌파적 경향이 강하고, 이문열은 보수 우파를 대변한다. 이들의 작품 성향도 이념이나 성향 면에서 차이가 난다. 즉 ‘아우를 위하여’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주인공들의 해결 방식이 각각 다르다. 노동판을 전전한다든지 북한을 갔다 와서 옥살이를 한 황석영의 삶도 파란만장하지만, 이문열 또한 좌익 사상에 빠져 가족을 내팽개친 부친 때문에 유년 시절에 생고생을 한다. 그는 그것의 반작용인지 오른쪽으로 시선이 많이 기울어져 있다.
나는 이문열의 작품도 많이 읽었지만, 황석영을 더 마음에 있어 한다. 그의 유려한 문체와 거친 실체적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그의 작품은 억지로 꾸며낸 뭔가 허전한 이야기가 아닌 살아서 꿈틀거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의 ‘오래된 정원’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데, ‘바리데기’에서 신산한 삶을 사는 탈북소녀 바리가 또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바리는 우리 민족의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원형이다. 작가는 바리를 통해서 서로 화해하고 인류의 공동체적 삶으로서의 구원과 연민을 그리려 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건너간 바리는 이곳에서도 안식의 삶을 얻지 못하고 안식과 고난의 부침을 계속한다. 그래도 비교적 이곳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리의 인간성과 샤먼적 능력이 바탕이 된다. 바리가 거주하는 곳의 다양하고 가난한 인종, 서로 다른 종교를 통해서 서로 반목하고 질시가 아닌 평화와 공존을 실천해 간다. 즉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불안정하나마 균형을 이루어 살아간다.
바리가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죽은 개 칠성이와 할머니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포기하려는 바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애쓰지 말라. 세상에 간직한 네 몸은 네가 아니야. 네 넋에 집이지. 몸을 버리고 떠나오문 너두 우리처럼 된다. 아직 너는 할일이 남아 있다. 생명수를 찾아야지.’(265쪽). 바리공주 설화를 빌어 할머니가 바라는 ‘생명수’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이 책 끝의 작가 인터뷰에서는 ‘생명수’가 과연 무엇이고, 과연 바리가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 그 답을 독자에게 미루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옥죄어오는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인류에 대한 희망과 구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황석영의 유려한 문체와 동양적 서양을 아우르는 내용은 나의 흥미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또 다른 그의 작품‘심청’이 생각났다. 그 이유는 우리 고전을 세계화에 대입하여 전개하는 ‘심청’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