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와 남아공화국의 백인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던 동안 백인정권에 맞서 싸운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동지들을 도와준 한 사나이를 만나려고 했습니다.때는 1997년 10월.미국정부는 만델라에게 그 나라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테러지원국이라는 이유죠.만델라는 발끈했습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도와준 내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가는데 왜 미국정부가 가라말라 하는 것인가?"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 여러나라들은 백인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흑인들을 실제로 도운 적이 없습니다.오히려 백인정권을 지원했지요.겉으로는 흑인차별을 비난하는 제스처를 곁들이면서...

   결국 만델라는 그리운 친구를 만났고 그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고훈장을 수여했습니다.이 훈장을 받은 사나이는 당시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입니다.지난 주 비명에 사망한 바로 그 카다피입니다. 

    카다피를 옹호하는 글을 썼던 모모인사들을 마치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비난하는 글들이, 카다피가 궁지에 몰린 올해 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습니다.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하도 이렇게 치우친 흐름이 커서 균형을 맞춰볼까 하는 마음으로 만델라와 카다피의 우정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1956년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수에즈는 이집트 것이다! 를 외쳤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을 내세워 이집트를 침력했습니다.이때가 냉전의 절정기인데도 미국과 소련은 한편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주저앉혔습니다. 미국 소련 양강대국의 시대가 왔음을 만방에 과시한 상징적인 사건이죠.

   2011년 리비아는 다릅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나토의 깃발 아래 군사개입했습니다.리비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는 바로 이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였습니다.군사개입은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지만 이탈리아 역시 리비아를 식민지배했던 전력을 내세워 개입하고 있습니다.수에즈 운하 사건 때와는 다른 상황입니다.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멀찌감치 물러서 있고, 미국은 최첨단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60년대에 쿠데타를 일으킨 제3세계 군부지도자들이 다 그랬지만 카다피 역시 낫세르를 존경했고 낫세르의 장례식(1971년)에도 젊은 지도자로 참석했습니다.하지만 카디피의 장례식에는 누가 참석할까요? 장례식이라도 열릴지 의문입니다. 

  나는 이제 민족주의에 대해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여성과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독재자들을 워낙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에도 해괴한 불순물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하지만 애초에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아랍민족주의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카다피의 비참한 최후에 왠지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카다피 사망소식이 들리던 지난 목요일 금요일, 나는 1986년 10월호 신동아에 실린 르포,' 리비아 대수로 공사장의 한국인들(서중석 신동아 기자)'을 읽고 있었습니다.르포 중간에는 리비아 대수로를 추진한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 씨와 카다피 원수가 준공식에 참석한 흑백사진이 실려있군요. 이때만 해도 카다피는 40대.

  이제 아흔이 넘은 만델라 님은 카다피 사망소식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진 2011-10-2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만델라님의 생각이 궁금하군요... 자신이 직접 훈장까지 준 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았을텐데 말입니다...(정치는 잘 몰라서 깊게 개입을 못하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0-25 16:19   좋아요 0 | URL
카스트로는 카다피의 죽음은 사실상 암살이라며 서방진영의 무력개입을 비난했다는데 아직 만델라는 조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