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경술국치 100주년. 한일병합 100주년이기도 합니다.그래서인지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은 한일병합 무효 공동선언을 했고 이 선언을 일본에서 주도한 학자가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알려진 와다 하루키 씨입니다.와다 씨는 독도문제에서도 독도의 한국영유권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인터뷰할 때도 다케시마라고 하지 않고 독도라고 말합니다.우리나라 신문에도 기고하고 있는데 올해는 특이하게 보수신문인 매일경제신문에도 인터뷰 기사가 났습니다.
이런 소식으로 보면 와다 하루키는 대단히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 같습니다.하지만 올해 와다 하루키의 이름이 또다른 사건에서 오르내렸는데 바로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파동입니다.이 사건은 요란하게 신문에서 떠들었지만 끝마무리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이 사건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내린 인물은 역시 총리실의 이인규 씨지만 사찰피해자로는 김종익 씨가 한동안 화제가 되었습니다.그런데 이 김종익이라는 사람의 정체가 수상하다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는 순수한 민간인이 아니고 불온서적을 탐독하는 좌익이라는 이야긴데요...그가 무슨 서적을 탐독하길래 불온분자인가 했더니...와다 하루키와 이종석의 저작을 읽었다는 겁니다.
가끔 가다가 지나치게 강경하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일부 단체에서 이런 주장을 하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우리나라 여당의 대변인인 조해진 씨가 대변인 성명에서 "김종익이란 이런 책을 읽으니 문제있는 사람이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위의 저작 외에 에드워드 카의 저작인 <혁명의 연구>도 김종익의 독서목록에 있다하여 역시 불온서적이 되고 말았는데, 카는 켐브리지 대학의 유명한 역사학 교수요, 이 책은 그의 유럽근대사상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잘 보여주는 명저로서 전혀 불온하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더군다나 카는 비마르크스주의자인데 왜...아마 저 혁명이라는 단어때문인가 봅니다.
문제가 된 와다의 책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인데 김일성의 만주항일운동을 객관적으로 다룬 책으로서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습니다.이 책은 결코 김일성 찬양서적이 아닌 아카데믹한 학술서적으로서 출판 당시 북한관변지식인들이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하지만 이 책이 불온하게 보인 사람들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책으로 해석한 모양입니다.게다가 이 책의 번역자가 이종석입니다.이종석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의 햇볕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한때 통일부장관을 지냈습니다.햇볕정책을 싫어하는 이들의 집중 타깃이지요.김종익이 읽은 <조선 노동당 연구>나 <현대북한의 이해>도 이종석의 저작입니다.이런 책을 읽은 김종익은 그러므로 불온한 인물이라는 결론입니다.
도대체 와다는 양심적인 지식인인가요? 한일병합을 규탄하고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고 있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또 불온한 지식인인가요?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남북의 화해를 촉구하고 있으니 그렇다는 겁니다.와다 씨는 올해 김대중 학술상의 수상식에서는 남한이 먼저 북한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어럴 때는 불온한 지식인이 되는 건가요?
한국에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얼치기 짓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주류는 친일파라는 주장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하지만 그 어떤 신생독립국의 권력자들도 자신들이 민족주의의 수호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게 되어있습니다.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나라의 공식지배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이 내건 반공반일입니다.반공만 가지고 명분이 안 서니 반일까지 같이 내세운 겁니다.나이든 세대들은 이승만 정부 시절 붓글씨 시간에 반공반일을 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니 반일을 당당히 내세우는 것입니다.
와다 하루키가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행동은 반일반공 중 반일정서에만 부합되니다.하지만 그가 김대중과 친하고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행동은 반공이념으로 보면 떨떠름합니다.더 나아가 불온하게 보이는 것이지요.와다 하루키가 사상이 의심스런 인물이라는 공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참여정부 초기 국정원 차장으로 내정되었던 서동만 씨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한나라당이 공격했을 때도 그 이유가 서동만 씨의 동경대 유학 시절 그의 학위논문 지도교수가 와다 하루키라는 것이었습니다.그 당시 보수적인 온건파 지식인 권영빈 씨가 "와다 씨는 그 학문적 명성이 있는 학자로서 불온한 인물이 아니다"고 점잖게 조언한 바 있습니다.그런데 올해 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와다 씨가 한일병합 무효를 주장하면서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는 바로 그때에.
명성황후 시해를 반성한다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임진왜란을 반성한다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일제시대를 반성한다는 일본인들도 있습니다.그런데 와다 하루키 같은 지식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한국의 군사독재정권과 공조한 일본우익은 반성해야 한다는 데에까지 나아갑니다.반성은 좋지만 여기까지 나아가면 안 된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한국의 반일은 반공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입니다.하지만 이번 5월에 한일병합 100주년 한일지식인 공동선언에 이름을 올린 이들 중 일본측 지식인 상당수가 진보파인 이와나미(일본의 진보적인 출판사이름)인맥이며 이들은 한국우익의 눈으로 보면 빨갱이입니다.즉 한국의 군사정권에도 매우 비판적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재밌는 것은 한국측 지식인 명단에는 햇볕정책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는 점입니다.보수파들 역시 자기들의 정권 정통성을 반일주의에 두고 있으니 그들이 이런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당연하지요.
수탈론은 정의이고 식민지근대화론은 뉴라이트가 주장하고 있다는 엉성한 이분법을 가지고 진보주의자입네 하고 거들먹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하지만 식민지 시기 일본인들이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논박한 논문을 쓴 이선근(이선근도 만주에서 친일행적을 한 적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지만)이 박정희 정부 시절 민족주체적 역사교육을 주창한 지도인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박정희 정부 때 민족주의에 기반한 전통문화연구가 붐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반공과 반일의 단단한 결합을 모르고 엉성한 반일주의에만 매달려 있어가지고서야 제대로 된 비판이 되겠습니까.나는 리영희 씨를 중국이나 베트남 전문가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지배이데올로기가 반공과 반일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한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나는 한국과 일본이 운동경기할 때마다 우리나라 아나운서들이 일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 싫다,그런 식의 반일주의가 오히려 군사정권의 한일유착 같은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흐리게 한다"
반공에 눈이 멀어 와다 하루키를 빨갱이라고 하는 주장을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김대중과 친하고 햇볕정책을 찬양하면 아무리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외쳐도 불온분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