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의 미국외교와 비교해보면 드골의 실용외교는 더욱 빛난다.미국은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중국을 인정한 뒤 동남아를 일종의 중립지역화하라고 했다.공산권이라고 해서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러시아 민족,중국민족,베트남민족이 있을 뿐이라는 드골의 소신은 지금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반면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세계 공산주의에 대한 성전으로 간주하고 드골의 조언을 물리쳤다.이때 드골은 어리석음과의 싸움이 제일 골치아프다고 했다던가.

미국의 그늘에서 탈피하려 했던 드골의 자주외교도 주목할 만하다.2차대전 후 미국은 마샬계획을 통해 유럽경제를 기사회생시키고 나토를 통해 안보까지 맡아주는 나라였지만 언젠가 나토에서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드골.1958년 정계복귀한 그는 2년이 못되어 원폭실험을 단행한 뒤 이렇게 선언했다."나는 프랑스의 안보를 한 외국인 장군이 좌우하는 사태를 단호히 거부한다.우리는 미국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당시 나토 사령부가 프랑스에 있었다.1962년 알제리 독립문제를 마무리한 그는 1963년 독-불 조약으로 미국일변도 탈피를 분명히 했고 이어 중국을 승인하고 베트남에서 미군은 나가라고 요구했다.1966년 마침내 나토에서 탈퇴를 감행한 드골은 나토본부를 프랑스에서 내쫓았다.

이런 자주전통은 드골의 정적이던 미테랑 정부 시절에도 이어진다.1986년 4월 미국의 레이건은 리비아를 폭격하려고 영국기지에서 미국 폭격기를 출동시켰을 때 미테랑은 프랑스 영공 통과를 불허했다.결국 미군 폭격기는 이베리아 반도를 돌아 지중해로 가야했다.

드골은 군인시절 그의 최고 계급인 준장을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대로 유지했고 프랑스인들이 자기를 드골 장군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프랑스인들 역시 드골 대통령보다는 드골장군이라고 불러주었다.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군인출신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자기 마음대로 별을 다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버린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우리나라의 드골 연구의 선구자는 송건호 씨.그는 30대인 1964년,< 드골 프랑스의 영광>  탐구신서 를 냈다.그 뒤 신태양사에서 드골 사망까지를 증보해서 냈다.송건호 씨는 계속 우리나라의 자주에도 관심을 갖고 일제시대사 및 한국현대사를 연구하여 책을 내더니 마침내1979년 일제시대사인 <한국현대사론> 한국신학 연구소 을 낸다.그  동안의 일제시대사와는 달리 일제에 협력했던 이들의 명단이 많이 나온 책이었는데 임종국 씨의 책과 더불어 그 방면의 귀중한 참고도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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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7-1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분량도 고려해서 쓰신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6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글씨에 익숙해서...독서일기 따로 쓰고 여기에 올릴 글 따로 쓴 뒤 자판 두드리기 시작합니다.손목이 별로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이상하게 바로 모니터 보면 글이 안 써지네요.나이도 젊은데 버릇이 그렇게 들어서 그런가 봐요.

로쟈 2008-07-16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신문의 칼럼 분량이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제 독서일기에 이 정도 분량의 글을 많이 썼죠.헤헤헤...그래서 쓰다보면 저절로 그렇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