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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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리한 초반을 지나 '빛과 그늘 속 <해변의 카프카>'라는 장에 와서야 뭔가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 싶다. 마치 <1Q84>처럼 장을 하나 건너씩 진행되는 이야기가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는데 한 장을 건너 뛰어 '속이 텅빈 사람들의 자기증명'이라는 장에서 엘리엇의 'Hollow Man 속이 텅빈 사람들'이라는 시에 대한 하루키의 해석은 나름 새로운 면이 있다. 그저 머리 속에 든 게 없는 공허한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좀 더 나아가 기존관념이라는 지푸라기만 가득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그런 기존관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인간들이라는게 그의 해석이다.  도서관 사서 오시마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지만 작가 하루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오시마를 통해서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인간들을 혐오한다고. 지푸라기라는 이미지는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독자로서 오시마의 의견에 공감한다.

 

또 한 가지 학생운동의 무고한 희생양이 된 인물을 두고 오시마가 비난하는 학생운동의 '경직된 시스템,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적 독불장군 같은 계급투쟁의 운동방침'. 또한 이렇게 상상력이 결여된 편협하고 경직되고 속 좁은 비관용성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는 그의 말에서 일본 학생운동의 폐단에 대한 하루키의 거침없는 비판을 접하게 된다. 한국역시 이런 역사의 한 과정을 밟아온 터라 그 대목을 읽으며 과연 그의 비난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해야할 지 부분적으로 수용해야할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후자쪽으로 생각이 기울겠지만 이런' 상상력이 결여된 경직성이란 기생충과 같아서 숙주를 바꿔가면서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며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오시마 혹은 하루키의 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속이 텅빈 사람들, 지푸라기..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다보면 제임스 조이스가 <야시장 bazaar>라는 단편에서 일상의 반복된 행위 속에서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한 묘사가 떠오른다. 소년이 야시장을 갔을 때는 이미 시장이 철시된 상태였고 그 과정에서 소년의 눈을 통해서 마비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렸던 것 같은데 왠지 그 이미지와 소년이 문닫은 시장을 바라보는 옆얼굴이 떠오른다.

 

좀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중간에 물고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영화 <매그놀리아>를 연상시키면서 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도 차선을 가득 메우고 막힌 차들을 보면서, 학원에서 돌아오는 여학생, 학원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 아이들, 거리를 걸어가는 행인들을 보면서 서울이 약동하는 도시라는 생각 한 켠에 저 많은 차들은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무엇을 위해 달리고 배우고 경쟁하는 것인지. 분명 활발하게 약동하는 도시인 것만은 분명한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혹은 그런 치열한 생존경쟁이 우리의 안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키의 장작불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참으로 정적인 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 저것을 어떻게든 묘사하거나 그 불길에서 떠오르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 솟아오른다. 하지만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길에 비해 그 묘사는 턱없이 초라하다는 생각을 늘 해오던 터에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집시들이 일할 때 늘 피워놓는 장작불에 대한 그의 묘사를 보면서 무릎을 친 기억이 난다. 감격한 나머지 지인들에게 그 부분을 문자로 보냈다가 돌아온 썰렁한 반응과 함께. 흐라발의 소설을 생각하면 폴란드 기숙사의 지하실을 사진에 담아올걸 하는 생각이 든다. 청소하는 아줌마, 고장난 걸 수리해 주는 아저씨들이 일하는 공간인데 천정의 배수관을 따라 크리스마스 전구가 달려있기도 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폐휴지로 수거해온 책을 압축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 역시 지하에서 일하는데 그 허름하고 우중충한 공간과 크리스마스 트리, 수족관이 공존하는 걸 보면서 왠지 이 공간을 보면 흐라발의 소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으시시한 엘리베이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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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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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서점에서 찾는 책이 없어서 한갓지게 고른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신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르게 된 것 같다.  

처음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이 사람은 참 일본사람이구나. 어찌나 이야기가 담담한지 성격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소제목이 달린 작은 챕터의 연속이라 시간날 때 마다 한 챕터씩 들여다보곤 했는데... 

무엇보다 달리기를 하는 취지에는 공감이 가는 바가 크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왠지 불규칙적인 생활과 어떤 퇴폐적인 인상을 풍길거라는 고정관념에 대해 하루키는 소설청작이 육체노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잠시 반짝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계속 소설가로서 작업하기 위해서 기초체력이 필요했다는 것. 글을 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면 글쓰기 중반에서 헉헉대기 십상이라는 것을. 이것이 나의 공감포인트 원. 

두번째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였다. 정말 일본인다운 꼼꼼함으로 마라톤을 준비했음에도 경기결과는 점점 나빠지고 무릎이 말을 듣지 않는 다거나..  이런 저런 노화의 징후가 나타나지만 자연스런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달리기를 즐겁게 하자는게 그의 생각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좋아서 하는 달리기를 하면서 즐거우면 그만.  내 친구나 내게 이런 운동은 어떤 게 있을까? 자전거, 골프, 테니스, 수영...? 자신의 취향대로 찾으면 될 것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늘 마주치는 어여쁜 아가씨와 눈인사만 나누지만 때로는 그 여자를 만난다는 기대로 집을 나선다던가  일본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들과 스쳐가면서 느끼는 묘한 연대감, 그렇게 어렵게 훈련한 선수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안타까움. 달리기용 슈즈를 세심하게 고르고 거리에서 타닥타닥 자신이 내는 발걸음에 귀기울이는 것. 모두 작은 일상사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나는 이야기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하루키가 자신의 사회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는 대목이었는데 자신은 별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편이고 사회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재즈바를 운영하던 10년의 기간동안 집약적으로 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배울 것은 그때 거의 배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과 교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날 수도 있고 이렇게 작품으로 교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 이 책의 제목을 봐도 상당히 사람들과 소통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제목에서 따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신문 서평이나 역자후기에서 건강과 성공에 대한 비결을 보여준다거나 어떤 교훈을 준다는 평을 볼 수 있는데 나는 별로 그런 평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평을 검색하다보니 마라톤 동호회에도 꽤 서평이 올라온 걸 보면. 하루키가 마라토너나 젊은 소설가들에게 어떤 교훈을 남기려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작가로서 아마츄어 마라토너로서 걸어온 길, 자신의 생활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고 나서 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읽다보면 좀 맹숭맹숭하다. 그런데 오늘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서 돌아오면서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얘기는 달리기를 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수영이건 철인삼종경기건... 우리는 모두 그런 순간을 '안다.' 소설 쓰는 법을 모두 달리기를 하면서 길 위에서 배웠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 내용 역시 독자인 내게는 좀 막연하기는 하지만. 어쨓든 이제 <해변의 카프카>로 넘어간다. 읽으면서 너무 술술 읽혀서 이걸 읽어도 되는 건가?하는 이상한 죄책감 같은게 들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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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 오늘의시민서당 43
피터 브룩 지음 / 청하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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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그로토프스키 연구소를 찾아갔다가 피터 브룩 연출의 최근작 <11과 12> 표를 사게 되었다. 사실은 볼 생각을 않고 있다가 표가 매진되었는데 특별히 한 장을 구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럼 나도, 하고 보게 되었는데. 그로토프스키 연구소는 생각보다 굉장히 작았다. 시장광장이라고 부르는 스타르넥의 그것도 정 중앙의 건물에 있는 연구소는 도서관과 사무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사무실은 작아도 여기서 연극의 열정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책에 실린 사진을 보고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피터 브룩도 그로토프스키와 같이 작업을 했다고 한다. 

<11과 12>는 2005년에 초연되었고 이번에는 배우를 달리해서 다시 올리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영어로 된 공연을 보게 되니 마음이 심히 가벼웠다. 무대는 그의 책 <빈 공간>을 떠올릴 정도로 텅 빈 무대에 새총으로 씀직한 나무 세 그루가 있을 뿐이다. 바닥과 뒷 면에는 붉은 책 천이 깔려있고 약간의 모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날 처럼 기도문을 11번 외우고 나면 사부님의 축복이 있고 요가에서 얼굴을 씻는 듯한 동작으로 기도가 마무리된다. 하루는 사부님이 깜박 조는 바람에 11번의 기도문 암송이 끝나고 잠깐의 침묵. 일동은 무의식적으로 기도문을 한 번 더 암송한다. 그리고 사부님의 축복. 이런 우연한 오차가 나중에 부족간의 큰 대립과 폭력으로 번지게 되는데...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극은 공연내내 작가를 연기하는 배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대사에 의존하는 면이 많고 보여주기는 아주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극에 몰입하기 보다는 대사에서 전달되는 메세지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같았다. 폭력의 문제를 다룬 이 극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 티에르노가 하는 말. 자신이 죽을 때 친구보다는 적이 많아지리라는 것.  

공연을 보고난 한 학생은 전에 본 피터 브룩의 연극보다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글쎄 정치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한국 현실에서 볼 때 이 정도 수위는 정치적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예화를 들자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을 나비에 빗대어 얘기한 티에르노의 우화를 들 수 있겠다.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곳에 첫번째 나비가 갔다와서 '스승님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고 하고 두 번째 나비는 '좀 더 가까이 가서 발을 데었다'고 하고 세번째 나비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스승은 마지막 나비가 진리의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나의 진실과 너의 진실은 초승달과 같아서 서로 대척점에서 대립하다가 어느 순간 보름달이 되면서 진실 자체의 진실이 된다는 말은 불교의 선문답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극에서 인용되는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티에르노의 대답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스승님 신이란 무엇인가요?' 

'신이란 인간의 마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니라.' 

'확실한 답을 얻고자 여쭈었더니 더 모르겠사옵니다. 인간의 마음을 곤혹스럽게 하다니요 ?' 

'이제야 네가 제대로 질문을 하는구나. 우선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증명해야 할텐데 그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느니라.인간은 신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이란 인간의 마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이지.'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볼 수 없다고 만질 수 없다고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연 내내 귀를 쫑긋하고 귀기울여야 할 메세지들이 들려오는 반면에 극 자체는 그렇게 흥미진진하지 않다. 누구의 말대로 전형적인 서사극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스펙타클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폭력의 문제에 대한 노연출가의 시각을 감상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볼 수도 있겠다. 한국에는 LG아트센터에서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공연된다.  

단지 한국에서는 티켓 값이 너무 비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공연이 끝나고 부페가 차려져 있어서 저녁을 해결하고 공연에 대한 얘기도 좀 할 수 있었다. 티켓값 40즈워티(16000원)에 상당한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누구의 말대로 피터 브룩이 폴란드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공연순서도, 파리, 브로츠와프, 런던으로 되어 있으니. 티에르노 역을 맡은 배우와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석 달동안 그로토프스키 연구소에서 워크샵을 했는데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그로토프스키 연구소에서 다른 프로젝트로 역시 워크샵을 했던 한 친구도 도미토리에 묵으면서 시간이 남을 때는 장작을 패고 하루 15시간씩 작업을 했는데 참 좋았다는 걸 보면 자연이 살아있는 폴란드에서 연극의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곳인 모양이다. 연습공간은 외곽지역에 따로 있고 새 연구소 건물이 조만간 완공된다고 한다.   

책에 대한 평점은 공연에 대한 평점이다. 글을 쓰면 책 이미지를 꼭 넣어야하는 건지 방법을 몰라서 올릴 수 밖에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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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파리입니다
M. 사세크 지음, 열린생각 옮김 / 열린생각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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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번 내리실 역은 파리, 파리입니다. 이런 어감이 풍기는 제목 <여기는 파리입니다> 글쎄.. 나라면 여기는 파리.. 여기가 파리에요.. 이렇게 번역했을까? 노트르담 성당 근처에 있는 Shakespaeare and Company라는 서점에서 산 책을 꼬맹이가 읽어달라고 해서 다시 읽었는데 녀석이 잠든 다음에도 혼자서 끝까지 읽었다. 역시 좋은 책이다. 

사섹은 체코 프라하 태생으로 건축을 전공한 탓인지 노트르담 성당 그림도 아주 정확하고 아름답다. 장미창을 보니 그 아이보리색 건물이 풍기던 기운이 다시금 느껴지는 듯하다. 사실 파리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사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책에 보니 뤽상부르 공원에 장난감 배를 빌려서 연못에 띄워볼 수도 있었고 어디에 가면 아이들이 실제 경찰아저씨에게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어린이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있었는데..  

만약 <여기는 파리입니다>를 프랑스 사람이 썼다면 이렇게 섬세한 디테일을 포착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방인이 본 파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파리의 모습을 자세히 알려줄 수 있었다고나 할까? 거리마다 가로등의 모습이 다르다든가  cafe & tabac 이 차나 담배만 파는 곳이 아니라 볼펜, 엽서, 우표 등을 팔고 타박 옆에는 꼭 우체통이 있다는 것. 좀 더 여유로운 마음이었다면 여기서 엽서를 사서 간단한 글을 적어 우체통에 넣는 호기도 부릴 수 있었을텐데.. 사섹은 특유의 위트있고 잔잔한 수채화로 여러가지 우체통들도 보여준다. 어떤 건 가로등 속에 우체통이 있기도 하고.. 물론 그가 이책을 쓴 건 1960년대지만 여전히 파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아주 독특한 여행가이드가 된다. 여행책자가 놓친 세세한 즐거움들이 사섹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셈이다. 

하여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여행 전이나 후에 사섹의 <This is ...>시리즈를 읽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여기는 런던이에요, 여기는 샌프란시스코에요에 이어 총 18권의 책이 나왔다고한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거금을 주고 산 책이 열린생각이라는 출판사에서 2005년에 번역되어 있네. <여기는 로마에요> <여기는 베니스에요>를 구해야할 텐데.. 이것 참.  

아! www.miroslavsasek.com 도 방문해보면 좋을 듯하다. 사섹을 좋아하는 분이 운영하는 사이트로 둘러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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