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 오늘의시민서당 43
피터 브룩 지음 / 청하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브로츠와프의 그로토프스키 연구소를 찾아갔다가 피터 브룩 연출의 최근작 <11과 12> 표를 사게 되었다. 사실은 볼 생각을 않고 있다가 표가 매진되었는데 특별히 한 장을 구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럼 나도, 하고 보게 되었는데. 그로토프스키 연구소는 생각보다 굉장히 작았다. 시장광장이라고 부르는 스타르넥의 그것도 정 중앙의 건물에 있는 연구소는 도서관과 사무실 정도가 있을 뿐이다. 사무실은 작아도 여기서 연극의 열정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건 책에 실린 사진을 보고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피터 브룩도 그로토프스키와 같이 작업을 했다고 한다. 

<11과 12>는 2005년에 초연되었고 이번에는 배우를 달리해서 다시 올리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영어로 된 공연을 보게 되니 마음이 심히 가벼웠다. 무대는 그의 책 <빈 공간>을 떠올릴 정도로 텅 빈 무대에 새총으로 씀직한 나무 세 그루가 있을 뿐이다. 바닥과 뒷 면에는 붉은 책 천이 깔려있고 약간의 모래.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날 처럼 기도문을 11번 외우고 나면 사부님의 축복이 있고 요가에서 얼굴을 씻는 듯한 동작으로 기도가 마무리된다. 하루는 사부님이 깜박 조는 바람에 11번의 기도문 암송이 끝나고 잠깐의 침묵. 일동은 무의식적으로 기도문을 한 번 더 암송한다. 그리고 사부님의 축복. 이런 우연한 오차가 나중에 부족간의 큰 대립과 폭력으로 번지게 되는데...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극은 공연내내 작가를 연기하는 배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대사에 의존하는 면이 많고 보여주기는 아주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극에 몰입하기 보다는 대사에서 전달되는 메세지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같았다. 폭력의 문제를 다룬 이 극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 티에르노가 하는 말. 자신이 죽을 때 친구보다는 적이 많아지리라는 것.  

공연을 보고난 한 학생은 전에 본 피터 브룩의 연극보다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글쎄 정치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한국 현실에서 볼 때 이 정도 수위는 정치적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예화를 들자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을 나비에 빗대어 얘기한 티에르노의 우화를 들 수 있겠다.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곳에 첫번째 나비가 갔다와서 '스승님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고 하고 두 번째 나비는 '좀 더 가까이 가서 발을 데었다'고 하고 세번째 나비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지고 말았다. 스승은 마지막 나비가 진리의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나의 진실과 너의 진실은 초승달과 같아서 서로 대척점에서 대립하다가 어느 순간 보름달이 되면서 진실 자체의 진실이 된다는 말은 불교의 선문답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극에서 인용되는 "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티에르노의 대답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스승님 신이란 무엇인가요?' 

'신이란 인간의 마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니라.' 

'확실한 답을 얻고자 여쭈었더니 더 모르겠사옵니다. 인간의 마음을 곤혹스럽게 하다니요 ?' 

'이제야 네가 제대로 질문을 하는구나. 우선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증명해야 할텐데 그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느니라.인간은 신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이란 인간의 마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이지.'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볼 수 없다고 만질 수 없다고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공연 내내 귀를 쫑긋하고 귀기울여야 할 메세지들이 들려오는 반면에 극 자체는 그렇게 흥미진진하지 않다. 누구의 말대로 전형적인 서사극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까? 어떤 스펙타클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폭력의 문제에 대한 노연출가의 시각을 감상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볼 수도 있겠다. 한국에는 LG아트센터에서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공연된다.  

단지 한국에서는 티켓 값이 너무 비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공연이 끝나고 부페가 차려져 있어서 저녁을 해결하고 공연에 대한 얘기도 좀 할 수 있었다. 티켓값 40즈워티(16000원)에 상당한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누구의 말대로 피터 브룩이 폴란드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공연순서도, 파리, 브로츠와프, 런던으로 되어 있으니. 티에르노 역을 맡은 배우와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석 달동안 그로토프스키 연구소에서 워크샵을 했는데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그로토프스키 연구소에서 다른 프로젝트로 역시 워크샵을 했던 한 친구도 도미토리에 묵으면서 시간이 남을 때는 장작을 패고 하루 15시간씩 작업을 했는데 참 좋았다는 걸 보면 자연이 살아있는 폴란드에서 연극의 열정을 불사를 수 있는 곳인 모양이다. 연습공간은 외곽지역에 따로 있고 새 연구소 건물이 조만간 완공된다고 한다.   

책에 대한 평점은 공연에 대한 평점이다. 글을 쓰면 책 이미지를 꼭 넣어야하는 건지 방법을 몰라서 올릴 수 밖에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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