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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 - 한글 580년, 팍스 코리아나로 가는 길
이현준 지음 / 해향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를 인류 문명사의 지평에서 새로이 조명한 이현준의 <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는, 일곱 고개를 넘어선 삶의 궤적 끝에서 만난 깊은 울림의 기록이다. 젊은 시절 글이란 그저 뜻을 전달하는 도구이자 삶을 꾸려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상의 속도를 줄이고 서재에서 조용히 책과 독대하는 시간이 늘어난 지금, 이 책이 들려주는 한글의 이치와 소리의 풍경은 칠십 평생을 거쳐온 내 언어생활을 돌아보게 만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원리를 현대적 발음학과 언어학의 시각에서 치밀하게 풀어낸다. 단순히 ‘위대한 문화유산’이라는 익숙한 칭송에 머물지 않고, 자음과 모음이 어떻게 인간의 발음 기관을 형상화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세상의 무수한 음성을 포용하는 구조를 갖추었는지 논리 정연하게 입증한다. ㄱ, ㄴ, ㄷ, ㄹ이라는 지극히 익숙한 기호 뒤에 숨어 있던 어마어마한 디자인적 철학과 과학적 엄밀함을 마주할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70대의 시선에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은 ‘소리와 문자 간의 경계 없는 포용성’이었다. 살아온 날이 쌓일수록 세상의 수많은 소리를 듣게 된다. 기쁨의 소리도 있었고, 슬픔과 탄식의 음성도 있었으며,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침묵의 파동도 있었다. 저자는 한글이 단순히 한국어만을 담기 위한 문자에 그치지 않고, 지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소리를 적어낼 수 있는 유연한 체계임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수많은 풍파와 타인의 삶을 담담히 품어내는 노년의 품성과도 닮아 있다.

돌아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나이는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백성을 불쌍히 여겨 누구나 자신의 뜻을 쉽게 펴게 하고자 했던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인생의 깊은 이치를 통달한 성숙한 혜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글을 몰라 억울함을 겪고 소통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문자를 선물한 것은, 단순한 언어적 혜택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아준 숭고한 행위였다. 이 책은 그러한 창제 정신의 숭고함을 덤덤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로 깨워준다.

책을 덮고 나니 서재에 쏟아지는 햇살 아래 내가 평소 쓰던 낱말들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매일 무심코 써 내려가던 수필이나 칼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호의 조합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내 안의 소리를 세상 밖으로 정확히 꺼낼 수 있는 도구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가나다라: 세상 모든 소리를 적는 문자>는 언어학에 관심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이들에게도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세상을 향한 시선이 한층 넓어지고 따뜻해지는 칠순의 길목에서, 우리 문자의 눈부신 이치를 다시금 배우고 가슴에 새기는 뜻 깊은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