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 한국철학전집 3
정도전 지음 / 결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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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고 난 뒤 마음에 남는 잔향은 나이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청년 시절에 이 책을 접했다면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품었던 원대한 야망이나 국가 개혁의 스펙터클한 전개에 마음이 쏠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의 고개를 수없이 넘어온 70대의 눈으로 바라본 정도전의 삶은, 권력의 화려함보다는 그 뒤편에 깔린 고독과 집념, 그리고 한 인간이 시대를 마주하는 깊은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제목인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을 만드는 자가 되어라>는 단순한 권력 쟁취의 기술이나 지략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것이 한 지식인의 지독한 소명의식에 관한 기록임을 깨닫게 된다. 정도전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의 한계를 딛고, 도탄에 빠진 고려 말의 현실을 스스로 고쳐보고자 했던 인물이다. 스스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주인공이 되기보다,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담아낼 수 있는 인물(이성계)을 발굴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길을 택했다.

 

이 지점에서 70대의 삶을 살아온 이로서 깊은 울림을 받는다.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서면 내가 직접 무대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욕심은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된다. 대신 내가 가진 경험과 지혜, 그리고 평생을 가다듬어 온 신념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 자리를 채운다. 정도전이 보여준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은 단순한 권력의 막후 조종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버리고 시대의 대의를 위해 판을 짜는 설계자의 자세였다.

 


책 속에서 그려지는 정도전의 한양 도성 설계, 법제 정비(조선경국전), 그리고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은 그가 단순한 정치가를 넘어 준비된 사상가였음을 보여준다. 왕조를 바꾸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도 그가 중심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명확한 시스템이념을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왕이라는 개인의 역량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신권과 법치에 기초한 지속 가능한 국가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 그의 혜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의 삶은 다방면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이방원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며 비참한 종말을 맞았고, 오랜 세월 역적이라는 굴레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라는 길고 긴 호흡으로 볼 때, 그가 남긴 조선의 기틀과 사상적 토대는 500년 세월 동안 이어졌다. 7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며 깨달은 삶의 진리 중 하나는, 한 사람의 승패는 눈앞의 성공이나 실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도전은 비록 당대의 싸움에서는 패했을지언정, 역사 전체의 판에서는 승리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나이가 든 이들에게는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나는 과연 어떤 씨앗을 심으며 살아왔는가를 돌아보게 만들고, 젊은이들에게는 눈앞의 성공보다 더 큰 대의와 준비된 역량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인생의 황혼기에서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내가 직접 세상을 바꾸는 주연이 되지 않더라도,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지혜와 정성을 다해 다음 세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정갈한 바탕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먼저 살아간 선배로서 가져야 할 참된 킹메이커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묵직한 울림과 함께 삶의 소명을 되새기게 만드는 뜻 깊은 일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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