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씩 걷는 파리 - 나만의 속도로 맞춰가는 열 조각의 파리 도보 여행
손지연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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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아득히 길어진 70대의 언덕에 서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에 일상의 소란함은 꺼지고 고요한 깊이가 들어앉는다. 젊은 시절의 여행이 목적지를 향해 가쁘게 달려가는 경쟁이자 수집이었다면, 일흔의 나이에 떠올리는 여행은 스쳐 가는 순간의 결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일에 가깝다. 손지연 작가의 산문집 <한 조각씩 걷는 파리>를 서재에서 펼쳐 들었을 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도시 파리의 풍경이 아니라, 그 길을 천천히 밟아 나가는 작가의 정갈하고 담담한 걸음걸이였다.

 

이 책은 파리라는 거대한 박물관을 효율적으로 둘러보는 명소 안내서가 아니다. 대신 저자는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작은 골목길, 이름 없는 카페의 낡은 의자, 퐁네프 다리 아래로 고요히 흐르는 센강의 물결을 한 조각씩 섬세하게 수놓듯 담아낸다. 작가가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남긴 문장들은 타인의 여행기를 넘어,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처럼 다가온다.

 

70대의 시선으로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까마득한 청춘의 한 자락을 떠올렸다. 한때 우리 모두는 세계의 중심에 서고 싶어 조바심을 냈고, 더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손에 쥐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았다. 그러나 칠십 평생을 살아내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된다. 삶의 참된 풍요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깊이 누리고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여백을 품었는가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자가 파리의 거리에서 찾아낸 '한 조각의 여유'는 곧 바쁜 세월에 치여 잊고 살았던 우리 내면의 여백과 맞닿아 있다.

 

특히 저자가 담아낸 낯선 도시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절제된 관조는 노년의 정서와 깊은 공명대를 이룬다. 낯선 풍경 속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외로움과 소소한 다정함을 과장 없이 포착해 내는 문체는 참으로 정갈하다. 늙어간다는 것 역시 평생 살아온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라는 존재와 조용히 면담하는 낯선 여정이 아니던가. 저자가 파리의 한 조각을 걸으며 느꼈을 고요한 평온은, 내가 서재에 앉아 지난날의 추억을 가만히 반추할 때 느끼는 마음의 평정과 닮아 있다.

 

글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시선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삶의 본질을 가만히 보듬는다.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그늘을 포장하지도 않고, 일상의 고단함을 무겁게 내비치지도 않는다. 그저 걸음마다 스쳐 가는 바람과 햇살, 그리고 인연들을 고스란히 머금는다. 이러한 담백한 시선이야말로 세파를 견뎌낸 이들이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삶의 품격이다.

 

서재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노을은 눈부시게 밝은 한낮의 햇살보다 훨씬 더 깊고 그윽한 위로를 준다. 우리의 70대 삶 역시 그 노을을 닮았다. 너무 기뻐서 날뛸 일도, 너무 슬퍼서 저 밑바닥으로 꺼질 일도 많지 않은 지금, 내 지나온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가만히 긍정해 본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후반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혹은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의 여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이 책은 나지막하지만 깊은 울림의 안부 인사가 되어줄 것이다. 비록 멀리 파리로 떠나지 않더라도,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의 길을 한 조각씩 정성스레 걸어가며 이 가을의 시간을 가만히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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