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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 - 세계 6개 미술관에서 처음 시작하는 그림 여행
박혜성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박혜성의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를 읽으며 문득 젊은 날 미술관 어귀에서 느꼈던 낯선 중압감을 떠올렸다. 당시의 미술관은 왠지 모르게 문턱이 높고, 도록에 적힌 난해한 미학 용어들을 미리 숙지하고 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드는 장소였다. 지식을 습득하고 학식의 폭을 넓히기 위한 독서에 익숙했던 젊은 시절, 미술 감상 역시 일종의 답을 찾아야 하는 시험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칠십 고개를 넘어선 지금, 이 책의 제목처럼 ‘어쨌든 재밌다’는 가볍고도 명쾌한 일갈은 마음의 짐을 한결 덜어준다.
저자는 미술사를 뒤흔든 거장들의 숨겨진 비화와 작품 속에 숨겨진 디테일을 경쾌하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화려한 명작 뒤에 숨겨진 화가들의 인간적인 고뇌, 치기 어린 질투, 그리고 뜻밖의 유머는 높은 문턱 너머에 있던 예술을 우리 삶의 영역으로 성큼 끌어당긴다. 미학적 이론이나 엄숙한 비평 대신,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저자의 문체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 옆에서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친근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캔버스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평생에 걸쳐 오륙도의 거친 바람과 간월도의 조용한 바다, 굳건한 소나무의 정기, 그리고 흐드러진 유채꽃과 코스모스의 계절을 화폭에 담아온 아내의 붓질이다. 곁에서 아내의 작업 과정을 수없이 지켜보며 깨달은 것은,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매 순간이 묵직한 고뇌이자 고된 모색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묵직함 뒤에 숨겨진 예술의 또 다른 얼굴, 즉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던졌던 유쾌한 질문과 삶을 향한 열정을 보여준다.

7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터득한 진리 중 하나는, 인생의 진정한 깊이는 거창하고 엄숙한 명분보다 일상이 주는 소소한 재미와 여유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청춘의 시절에는 세상을 명확히 규정하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느라 바빴다면, 나이가 든 지금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태도가 더없이 소중하다. 미술관 역시 마찬가지다. 화가의 생애나 사조를 완벽히 외우지 않아도, 캔버스 위의 한 점 색채나 화가의 솔직한 인간미에 슬며시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자가 안내하는 미술관 풍경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삶을 견뎌내며, 때로는 삶을 위트 있게 풀어낸 흔적들을 추적하는 과정이다. 설명이나 해설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 속 인간의 호흡에 귀를 기울일 때, 미술은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시각적 울림 속에 화가의 숨결과 감상자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 바로 그곳에 미술이 주는 참된 재미가 있다.

<어쨌든 미술관은 재밌다>는 미술관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거닐게 만드는 친절한 안내서다. 서재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수백 년 전 화가들의 생생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판단하고 정답을 찾으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모호함과 불완전함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내는 여유. 그것이 인생의 후반부가 전해주는 선물이라면 미술 감상 또한 한결 자유로워져야 마땅하다. 주말이 오면 아내의 손을 잡고 가까운 미술관을 찾아가, 오랜 친구를 만나듯 작품들 앞에 서서 그 경쾌한 재미를 가만히 누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