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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ㅣ 메이트북스 클래식 32
호메로스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8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디세우스의 길고 긴 고향 복귀 길을 다시 읽는다. 청년 시절 고전이라는 이름의 의무감으로 책장을 넘기던 때와는 감회가 아주 다르다. 그때는 눈앞에 펼쳐지는 온갖 괴물과 신들의 방해, 화려한 모험과 영웅적 투쟁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일흔을 넘긴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영웅의 기상이 아니라, 모진 세파를 온몸으로 견뎌내며 결국 가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한 인간의 지친 등이다. 정영훈 역으로 새로 나온 메이트북스의 <오디세이>는 그 먼 길의 고단함과 삶의 깊이를 담담하고도 명징하게 전달해 준다.
트라이아 전쟁이 끝난 후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이다. 전쟁 자체에 쓰인 10년을 더하면 집을 떠나 있었던 세월이 무려 20년에 달한다. 젊음의 절정에서 출발해 인생의 가장 눈부신 황금기를 바다 위에서 보내고, 마침내 머리가 하얗게 희어진 뒤에야 고향 땅에 발을 내딛는 서사는 그 자체로 인간 삶의 축소판이다. 10년이라는 긴 방랑 속에서 그가 만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마녀 키르케, 세이렌의 유혹, 그리고 죽은 자들이 머무는 하데스의 음산한 저승 세계는 우리가 일생 동안 마주하는 공포와 욕망, 고독,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생의 고비들과 다르지 않다.

특히 바다 요정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에서 보낸 7년의 세월을 되짚어보는 대목에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칼립소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늙지 않는 불사를 약속하며 자신의 곁에 머물기를 청했다. 죽음과 노화라는 인간 본연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함은 진정 매혹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매일 바닷가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멀리 고향 이타카의 연기를 그리워했다. 유한하고 쇠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머지않아 늙고 스러질 아내 페넬로페가 있는 그 찰나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일흔이라는 나이에 이르러 보니 그의 선택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언젠가는 사그라질 삶이기에, 늙어가며 체온을 나누는 소박한 일상이야말로 그 어떤 영생보다 존엄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마음을 울리는 순간은 그가 마침내 고향 이타카에 도착했을 때다. 영웅의 화려한 귀환을 기대했던 세상의 시선과 달리, 그는 여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보잘것없는 거지 행색으로 자신의 궁전에 들어선다. 젊은 구혼자들이 며느리와 집안을 어지럽히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그는 분노를 삼키며 때를 기다린다. 오랜 세월 인생의 거센 풍파를 겪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제와 인내다. 진짜 힘은 요란한 구호나 과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바람을 견뎌낸 뒤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데서 나온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오랜 방랑을 끝내고 마침내 아내 페넬로페와 나란히 침상에 누워 서로가 지나온 고통과 시간을 나누는 마지막 장면은 이 거대한 서사시의 정점이다. 두 사람이 공유한 것은 단순히 재회의 기쁨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변함없는 믿음과 함께 견뎌낸 세월 그 자체였다. 삶이라는 긴 여정의 끝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 역시 화려한 업적이나 명예가 아니라, 함께 비를 맞춰주고 끝까지 곁을 지켜준 이들과 나누는 따뜻한 온기가 아닐까 싶다.

정영훈 역자의 번역은 옛 고전이 주는 문학적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요즘 독자들이 읽기 쉽고 간결하며 감각적인 문체로 서사를 끌고 간다. 덕분에 가독성이 뛰어나 페이지가 막힘없이 넘어간다. 메이트북스판 <오디세이>는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은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다에서 저마다의 ‘이타카’를 향해 항해하는 항해자들이다. 수많은 풍랑을 거치며 무언가를 잃고, 때로는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한다. 하지만 나아갈 곳이 어디인지 잊지 않는다면, 그 먼 방랑조차 결국은 돌아가기 위한 숭고한 과정이 된다. 오늘 밤, 책장을 덮으며 내 지난날의 풍랑과 수고로웠던 여정을 조용히 쓸어내려 본다. 오디세우스가 그러했듯, 나 역시 내 삶이라는 길을 묵묵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걸어왔노라고 나지막이 읊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