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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김도운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70년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삶이 늘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거침없이 달리던 젊은 날의 걸음이 멈추고, 빠르던 발이 느려지며,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인생의 그늘 앞에 망연자실 서 있게 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김도운 저자의 에세이 <그 자리에서>는 이처럼 삶의 속도와 익숙했던 시간을 잃어버리고 멈춰 선 이들의 마음에 정직하고도 깊은 울림을 전하는 책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뇌전증(간질) 진단을 받은 이래, 발작과 함께 시작된 주변의 차별과 무시, 모욕을 견디며 살아왔다. 괴롭힘을 피하고자 눈에 띄지 않으려 애썼고, 신체적 완치와 삶의 재편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신을 찾았다. 차별을 끝내고 희망을 전하고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으며 사역에 매진했지만, 정작 스스로 바랐던 신체적 치유나 상처의 완벽한 회복은 주어지지 않았다. 쉼 없이 달리던 사역 속에서도 깊은 상실감과 한계를 느끼며 결국 사역을 내려놓게 된 저자의 고백은 실로 아프고 무겁다.

흔히 종교적 간증이나 신앙 에세이라고 하면 시련을 극복하고 극적인 치유나 성공을 이뤄낸 화려한 반전 서사를 기대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단순한 ‘승리주의적’ 틀을 과감히 깨뜨린다. 저자는 신이 자신을 비켜나 숨어 계신 듯한 아득한 부재감, 그리고 기도가 즉각적인 기적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밀려오는 고독을 가식 없이 써 내려갔다. 멈춰 서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바로 그 순간, 저자는 화려한 치유의 성공담이 아닌 자신이 겪은 천대와 모욕, 그리고 그 고난 속에 감춰진 신의 비밀을 기록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거나 극복해 내는 과정이기보다, 나에게 주어진 한계와 상처를 있는 그대로 껴안는 과정임을 느끼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고난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겼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지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정작 나를 깊어지게 만들고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게 했던 것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뜻대로 되지 않아 정지해 있던 ‘그 자리’였다.

저자가 고백하는 ‘그 자리’는 절망의 끝자리가 아니다.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숨어 계신 신과 온몸으로 직면하는 거룩한 수용의 자리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질병과 고통이 당장 사라지지 않아도, 버려진 듯한 그 자리에서 여전히 일하시는 신의 숨결을 포착해 내는 저자의 시선은 눈물겹도록 맑다.

이 책은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섣부른 위로나 천편일률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슬그머니 곁에 다가와 손을 잡고 “나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조용히 읊조릴 뿐이다. 질병이나 연로함, 혹은 삶의 예기치 못한 풍파로 인해 인생의 멈춤표를 만난 이들에게 이 책은 깊은 안식과 소망을 안겨준다.
인생의 후반전에서 서서히 내려놓음을 배워가는 나이, <그 자리에서>를 다 덮고 나니 깊은 침묵 속에 감사와 평안이 남는다.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몸과 마음이 굳어가는 계절에, 내 삶의 멈춰 선 자리가 곧 은혜의 자리였음을 새삼 되새기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