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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리커버 에디션)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ㅣ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면 세상사 웬만한 일에는 감흥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눈부시게 화려한 명소보다는 익숙하고 조용한 시골길이 좋아지고, 사람들의 미사여구보다는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입담에 더 마음이 끌린다. 미국의 유머 여행 작가 빌 브라이슨의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바로 이런 노년의 심상에 딱 들어맞는 참으로 묘한 매력을 지닌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여 년간 정들었던 영국을 떠나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영국 섬 대륙의 남단 도버에서 북단 산꼭대기까지 홀로 발걸음을 옮기며 기록한 기행문이다. 칠십 평생을 살아온 내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영국 땅 구석구석을 누비며 내뱉는 수다와 투덜거림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인생을 관조하는 한 편의 유쾌한 희극처럼 다가왔다.

빌 브라이슨의 문체는 제목 그대로 ‘발칙’하다. 그는 영국의 지독한 날씨, 엉망진창인 대중교통, 별 볼 일 없는 시골 여관의 음식, 그리고 어딘가 시큰둥하고 무뚝뚝한 영국인들의 태도를 거침없이 꼬집는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저 ‘불평 많은 서양 작가의 야박한 글’이라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가 되고 보니, 그의 거친 입담 뒤에 숨겨진 깊은 애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정말 사랑하지 않는 공간에 대해서는 불평을 늘어놓을 에너지조차 생기지 않는 법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노부부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듯, 브라이슨이 영국에 쏟아내는 신랄한 비판은 도리어 그 땅에 대한 지독한 짝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 역시 까마득한 옛날, 젊은 날 거닐었던 낯선 길목들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거창한 유명 관광지보다는 낯선 작은 마을의 찻집, 비 오는 날 멍하니 바라보던 정류장 풍경처럼 소소한 기억들이 가슴에 남아 있듯, 저자가 발길 닿는 대로 거닐며 묘사하는 영국의 시골 풍경들은 내 지나온 삶의 한 조각들과 묘하게 겹쳐졌다.

특히 낡고 한적한 영국 마을을 걸으며 그곳에 쌓인 역사와 사람들의 숨결을 끄집어내는 대목에서는 깊은 공감이 밀려왔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물렀던 공간에 추억과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가는 과정이다. 저자가 풋풋했던 청년 시절 처음 영국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기억과,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 그 길을 다시 걸으며 느끼는 회한은 노년의 감수성을 여정 내내 두드렸다.

물론 저자의 유머 감각은 껄껄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지루할 틈 없이 터져 나오는 위트와 유머는 자칫 고루해지기 쉬운 일상에 기분 좋은 청량제가 되어주었다. “인생 별거 없다, 그저 털털하게 웃으며 걸어가는 것”이라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단순히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책이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떤 장소를 깊이 사랑하고, 그곳과 이별을 준비하는 아주 멋지고 유쾌한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여행을 더 다녀야겠다는 작은 조바심과 함께,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궤적도 이처럼 웃으며 추억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아주 반갑고 쾌활한 동반자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