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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코올중독 의사였습니다
이준서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 나이가 되면, 세상사 웬만한 풍파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담담해졌다고 자부하곤 한다. 수많은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을 지켜보며 삶의 궤적을 나름대로 정리해 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준서 의사의 고백록 <나는 알코올중독 의사였습니다>를 읽는 동안, 오랜 세월 굳어 있던 마음에 깊은 균열이 일어났다. 선망의 대상인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중독의 늪에 빠져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과정,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다시 걸어 나오는 여정은 인간의 유약함과 동시에 위대함을 절절히 깨닫게 한다.
우리는 흔히 알코올중독을 의지력의 문제나 개인의 타락으로 치부하기 쉽다. 특히 우리 세대는 술을 인생의 고단함을 달래는 동반자이자, 사회생활의 필수적인 윤활유로 여기며 다소 관대하게 대해온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젊은 시절, 고된 하루 끝에 들이켜는 술 한잔을 미덕으로 알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들을 그저 ‘자기관리가 부족한 사람’ 정도로 치부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오랜 편견을 정면으로 부순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엄밀하고도 지적인 직업을 가진 의사조차 중독이라는 질병 앞에서는 무력한 한 인간일 뿐임을 저자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며 증명한다.

저자가 겪은 중독의 과정은 참혹하다. 갈망을 이기지 못해 병원 화장실에서 숨어서 술을 마시고, 의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가장 소중한 가족의 신뢰까지 모두 잃어가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내가 의사인데 설마 조절하지 못하겠는가”라는 오만이 파멸을 재촉했다는 대목에서는 서늘한 경각심마저 든다. 나이가 들수록 내 경험과 지식이 절대적이라 믿고 오만에 빠지기 쉬운 법인데, 저자의 무너짐을 보며 삶의 어느 순간에도 자만은 금물임을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이 진정으로 빛나는 지점은 추락의 참상이 아닌, ‘치유와 회복’의 과정에 있다. 저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술을 끊을 수 없다는 비참한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회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고, 단주 모임(AA)에 참석하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는 과정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여기서 깨달은 치유의 핵심은 결코 혼자의 힘으로만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신의 취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서로 연대할 때 비로소 구원의 문이 열린다. 수십 년간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지켜봐 온 노년의 눈으로 볼 때, 저자가 찾아낸 치유의 연대는 현대 사회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가치, 즉 ‘서로 돌봄’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단주에 성공한 저자가 이제는 중독 전문의로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치료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결말은 가슴을 따뜻하게 적신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오점마저도 타인을 구원하는 고귀한 도구로 바꾸어 낸 저자의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은 단순히 한 알코올중독 의사의 극복기가 아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상실과 실패, 그리고 그 모든 시련을 넘어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숭고한 인간 승리의 기록이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주변의 아픈 이웃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깊은 성찰을 안겨주는 참으로 고마운 책이다. 완벽해 보이는 삶 속에서도 누구나 무너질 수 있으며, 동시에 아무리 깊은 수렁에 빠질지라도 다시 일어설 힘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는 연대 속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