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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시간여행 - 수채화로 길어 올린 추억의 풍경 ㅣ 여행길 그림책 2
최명옥 지음 / 인문산책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방의 한구석에서 먼지 쌓인 앨범을 펼쳐 든 것처럼, 최명옥의 <골목길 시간여행>은 기억의 저편으로 밀려났던 풍경들을 단숨에 눈앞으로 불러온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길을 걷고 수많은 문을 열었지만, 내 유년의 기억이 온전히 살아 숨 쉬는 곳은 화려한 대로가 아니라 늘 비좁고 어두웠던 골목길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지나간 시절에 대한 복고풍의 향수를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절 우리가 골목길에서 나누었던 삶의 온기와 공동체의 가치를 담담하게 반추하게 만든다.
저자가 안내하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은 이내 내가 자란 시골 마을의 어귀로, 혹은 청년 시절 치열하게 살아가던 옛 도시의 뒤안길로 이어진다. 지금의 도시는 모든 것이 반듯하고 깨끗하며 효율적이다.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되고 집과 집 사이에는 높은 벽과 보안장치가 가로막고 있다. 편리함과 쾌적함을 얻었지만, 대신 우리는 문을 닫는 순간 타인과 단절되는 고립을 택했다. 그러나 이 책이 기록한 골목길은 달랐다. 그곳은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었다. 대문은 늘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좁은 골목길은 누구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닌 모두의 마당이자 거실이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상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옛 동무들도, 젊은 날의 활기도, 그리고 그 시절의 풍경도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골목길 시간여행>을 읽으며 가장 가슴이 먹먹했던 이유는, 그 골목길이 담고 있던 ‘사람의 냄새’가 그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옆집에서 무슨 국을 끓이는지 냄새만으로 알 수 있었고,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꿸 정도로 이웃의 대소사를 제 일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들이 골목 어귀 평상에 모여앉아 콩나물을 다듬으며 나누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그대로 삶의 위로이자 연대였다. 그 시절의 가난은 서글펐지만, 골목이 주는 유대감 덕분에 외롭지는 않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과 고립을 겪고 있다. 노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정신적으로는 한없이 빈곤해 보인다.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이웃 사촌이라는 말은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고, 공동체의 윤리는 희미해졌다. 저자는 골목길의 풍경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질문한다. 그것은 서로를 향한 환대와 염치, 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온기다. 골목길은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삶의 애환을 나누는 소통의 광장이었으며, 노인들에게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랑방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에 머무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그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이 품고 있던 가치를 어떻게 오늘의 삶에 복원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색을 던져준다.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거대한 쇼핑몰이 채울 수 없는 인간적인 교류의 공간, 그것이 바로 골목길이 지닌 무형의 자산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깊은 숨을 몰아쉰다. 눈을 감으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흙먼지 날리던 유년의 골목길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길 위에서 나를 키워낸 수많은 이웃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골목길 시간여행>은 나 같은 노년에게는 인생을 따스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며, 젊은 세대에게는 가보지 못한 인간다운 삶의 풍경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속도와 효율만을 쫓는 세상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삶의 품격과 공동체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이 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깨워주고 있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바래지 않을 온기가 그 골목길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