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 가장 느린 것들이 가장 오래 빛난다
이유리 지음 / 청림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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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이 일흔을 넘기면 세상사에 더는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모진 비바람도 겪었고 성장의 계절도 지나왔으니 삶의 문법을 대략 통달했다고 자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유리 저자의 <식물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을 덮으며, 나는 여전히 삶이라는 거대한 정원 앞에서 서툰 초보 정원사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이 책은 단순히 식물의 생태를 설명하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초록의 생명들이 온몸으로 써 내려간 생의 철학이자, 속도에 지친 이들에게 던지는 고요하지만 묵직한 질문들의 모음집이다.

 

저자는 식물이 처한 가혹한 환경과 이를 극복하는 방식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특히 마음이 머물렀던 대목은 식물의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식물은 자리를 옮길 수 없다. 척박한 땅에 씨앗이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든 원망 없이 뿌리를 내리고, 때가 올 때까지 묵묵히 겨울을 버텨낸다.

 

돌이켜보면 내 지나온 삶도 그랬다. 청춘을 지나 가정을 일구고 책임을 다하는 과정은 끊임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조급해한다고 꽃이 먼저 피지 않으며, 겨울을 건너뛰고 봄을 맞이할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가 문장들을 통해 다시금 뼛속 깊이 다가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내면의 뿌리를 더 깊고 단단하게 내리는 과정일 것이다.

 

식물은 겨울을 앞두고 스스로 잎을 떨군다. 화려했던 여름의 영광을 미련 없이 버려야만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다음 해에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건강한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지치기라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일흔의 눈으로 보니 삶 또한 끝없는 가지치기의 여정이었다. 젊은 날에는 손에 쥐고 싶었던 명예, 재물, 욕심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인생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지금,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쓸데없는 집착을 쳐내고 마음을 비워낼 때, 비로소 내 곁에 남아 있는 소박한 일상과 가족의 소중함이 선명하게 보인다. 식물이 가르쳐준 비움의 기술은 노년의 삶을 더욱 담백하게 만들어주는 지혜다.

 

책은 식물들이 거친 자연 속에서 홀로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겉보기에는 각자 서 있는 것 같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는 뿌리와 미생물이 얽히고설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를 지탱한다. 커다란 나무는 어린나무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영양분이 부족한 이웃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

 

이러한 자연의 연대를 읽으며 내가 살아온 정든 마을과 이웃들, 고락을 함께해 온 이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인간 역시 홀로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누군가의 헌신과 따뜻한 정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식물들의 조용한 연대 방식은 우리가 어떤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지 나침반이 되어준다.

 

이 책은 노년의 독자에게는 지나온 삶을 다독여주는 위로를, 바쁘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베란다의 화초 하나, 길가의 잡초조차도 저마다의 우주를 품고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책을 덮고 창밖을 내다보니, 매일 보던 평범한 나무와 풀들이 전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네 속도대로 피어나고 저물면 그뿐이라고. 인생의 가을을 지나 겨울을 준비하는 이 길목에서, 나는 이 초록의 스승들이 건네는 다정한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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