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경을 넘어, 나를 설계하다 - 여러 나라를 지나 바이오더마에 닿기까지의 여정
하주현 지음 / 예미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보면, 삶은 결국 수많은 ‘선택’의 점들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선과 같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의 물줄기를 마주한다. 하주현의 <국경을 넘어, 나를 설계하다>를 읽으며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남은 시간의 의미를 깊이 곱씹어보게 된 것은, 이 책이 단순히 한 기업가의 성공 신화가 아니라 삶의 궤도를 스스로 수정하고 개척해 나간 한 인간의 치열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칠십 고개를 넘은 이들에게 ‘내려놓음’이나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은 다소 멀게 느껴질지 모른다.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보다 가진 것을 지키고 정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어 통번역사라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안정된 커리어를 과감히 내려놓고 프랑스어를 전혀 쓰지 않는 베네수엘라로 떠난다. 남편을 따라 떠난 길이었다고는 하나, 평생을 바쳐 이룩한 자신의 전문성을 단숨에 포기해야 하는 순간의 두려움과 막막함이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 역시 살면서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했던 순간들의 기억이 겹쳐지며, 저자의 첫 발걸음에 깊은 공감이 가닿았다.

저자는 낯선 언어와 문화가 지배하는 국경 너머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과거에 머무는 대신 ‘나를 다시 설계하는’ 길을 택한다. 여러 나라와 문화를 거치며 끊임없이 자신을 리모델링해 나간 과정은, 나이와 상관없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흔히 젊은 날의 도전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이지만, 진정한 용기는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든 익숙한 안락함을 깨고 나올 때 발휘되는 법이다.

현재 나오스 코리아의 대표로 서 있는 저자의 모습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 닥쳐온 변화를 피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역량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정의하고 확장해 온 노력의 산물이다. 우리는 흔히 은퇴를 하거나 나이가 들면 내 역할은 끝났다고 선을 긋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국경이나 환경, 심지어 나이조차도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한계가 될 수 없음을 나지막이 증명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스스로를 새로이 설계해 나가는 의지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힌트는 선택과 도전에 대하는 태도의 전환이다. 안정을 버리는 것은 퇴보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칠십 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여전히 넓고, 내가 채워 넣을 수 있는 삶의 여백은 남아있다. 비록 젊은이들처럼 세계를 무대로 뛰지는 못할지라도, 매일 마주하는 일상 속에서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는 것 또한 나만의 작은 ‘국경을 넘는 일’이 아닐까.
모든 커리어를 내려놓아야 했던 절망적인 순간을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은 저자의 기록은, 삶의 막바지 여정을 걷고 있는 나에게도 신선한 자극을 준다. 인생은 완성된 도면대로 지어지는 건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수하며 만들어가는 미완의 작품이다. 낡은 고정관념의 국경을 넘어, 남은 생의 시간 동안 나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설계해 나갈 것인가. 책을 덮으며, 거울 속에 비친 내 희끗희끗한 머리칼 뒤로 새로운 여정을 꿈꾸는 청년의 눈빛을 가만히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