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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과 전쟁 - 무기화된 화학 이야기
앨리스 러브조이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이 일흔을 넘기며 살아온 세월 동안, 필름은 언제나 추억의 동의어였다. 장롱 깊숙이 보관된 빛바랜 앨범 속에서 자식들의 백일 사진과 젊은 날의 결혼식, 이제는 가물가물한 부모님의 얼굴을 붙잡아두던 것이 바로 필름이었다. 우리 세대에게 필름이란 삶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을 박제하는 따뜻한 매체였다. 그러나 앨리스 러브조이의 <필름과 전쟁>은 대단히 서늘한 시선으로 이 익숙한 매체의 뒷면을 들추어낸다. 이 책은 우리가 평화롭고 서정적인 예술의 도구로 믿었던 필름이, 실상은 독가스와 폭약, 그리고 인류 파멸의 무기인 원자폭탄과 한 몸처럼 얽혀 성장해온 ‘군수품’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조명한다.

저자는 미국의 코닥과 독일의 아그파 같은 세계적인 필름 기업들이 어떻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수산업의 핵심 기지로 기능했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흥미롭게도 필름을 만드는 화학 기술은 화약과 독가스를 제조하는 기술과 뿌리가 같다. 셀룰로오스라는 동일한 물질에서 출발해 한쪽은 세상을 기록하는 필름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세상을 파괴하는 폭약이 되었다. 필름 공장의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은막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전장의 병사들을 질식시키는 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던 셈이다. 은밀하게 연결된 화학과 전쟁의 연대기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가 기억하던 아날로그의 낭만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그 자리에 차가운 군화 소리가 들어찼다.

특히 책이 다루는 핵무기 개발과 필름의 관계는 노년의 사색을 깊게 만든다. 아프리카의 깊은 광산에서 채굴된 우라늄이 히로시마의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피어오르기까지, 그 잔혹한 여정의 한복판에 필름이 있었다. 핵실험의 가공할 위력을 측정하고 방사능 낙진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군은 엄청난 양의 필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핵실험으로 발생한 방사능 낙진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코닥 공장의 필름들을 오염시켰다. 방사능에 오염된 필름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과 정부가 비밀리에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은, 미·소 냉전기의 광기가 어떻게 지구 환경과 일상을 잠식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을 기록하기 위한 매체가 도리어 스스로가 촉발한 파괴의 흔적에 의해 오염되는 이 지독한 역설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이 책을 덮으며 내가 살아온 20세기의 풍경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누려온 근대의 풍요와 문화적 혜택 이면에는 언제나 이처럼 보이지 않는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마냥 아름답게만 보였던 영화와 사진의 역사가 인류사에서 가장 잔인했던 전쟁들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는 사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의 이면을 늘 의심하고 성찰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늙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화려한 겉모습 너머에 숨겨진 뼈대를 볼 줄 아는 지혜를 갖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필름과 전쟁>은 나에게 친숙했던 과거의 한 조각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지시했다. 다양한 사료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윤리와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상이 어떻게 무기화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묵직한 보고서다. 은막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위험한 실체를 직시하는 일, 그것이 이 시대를 먼저 살아온 노년이 젊은 세대와 함께 나누어야 할 진정한 역사의 무게가 아닐까 싶다. 흔한 기록 매체로만 여겼던 필름 한 통이 이토록 거대하고 서늘한 질문을 던질 줄은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