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언제나 내편
박현옥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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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 나이 일흔을 넘기고 보니, 세상의 화려한 구경거리보다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자연의 풍경에 자꾸만 눈이 가고 마음이 머문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곁에 있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의 귀함을 몰랐으나, 이제는 느린 걸음으로 마주하는 자연이 삶의 가장 큰 동무가 된다.

 

박현옥이 쓴 <오름은 언제나 내 편>을 읽는 동안, 나는 몇 해 전 아내와 함께 조용히 다녀왔던 제주 여행의 기억을 나지막이 들추어보았다.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 애월의 한적한 카페에서 바다를 보고, 초록이 무성한 식물원을 거닐며 나누었던 평화로운 시간들이 책장 사이로 아른거렸다.

 

제주에는 약 368개의 오름이 있다고 한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때는 완만한 능선을 가진 아름다운 구릉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 책은 그 오름들이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거친 화산섬의 탄생 비화이자,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눈물겨운 삶의 터전이며, 신화와 역사가 촘촘히 얽힌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다. 서울에서의 고단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제주로 내려간 저자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로 뛰며 오름의 진짜 얼굴을 마주했다.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공부하고 문화유산 돌봄 현장에서 일하며 길어 올린 저자의 글 속에는 제주의 자연을 향한 깊은 애정과 존중이 깃들어 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을 넘기다 보면 오름이 품은 다채로운 풍경과 역사적 상처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설문대할망의 신화부터 제주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돌담과 숨겨진 숲 곶자왈, 그리고 봄날의 고사리 꺾는 풍경까지는 참으로 정겹고 따뜻하다. 그러나 오름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공간이 아니다. 4·3의 깊은 슬픔을 눈물로 삼켰던 곳이며, 일제 강점기 동굴진지의 상처를 고스란히 짊어진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름의 굴곡진 세월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우리 세대의 삶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모진 바람과 상처를 견뎌내고도 여전히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오름의 모습은, 시련을 딛고 살아남은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저자가 친절히 안내하는 14곳의 오름 길을 문장으로 따라 걷는 일은 그 자체로 호젓한 즐거움이다. 다랑쉬오름의 웅장한 분화구 앞에 서서 대자연의 호흡을 느끼고, 용눈이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을 바라보며 마음의 모난 구석을 둥글게 깎아낸다. 윗세오름의 장엄한 풍경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건축물도 자연이 주는 감동을 넘어설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의 말대로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걸을 때, 비로소 오름은 제 품을 온전히 열어 우리에게 바람 소리를 들려주고 마음을 만져준다.

 

살아가다 보면 세상 누구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외롭고 쓸쓸한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자식들을 다 키워 세상으로 보내고, 하던 일에서 물러나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노년의 문턱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럴 때 이 책의 제목처럼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안아주는 자연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오름은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으며,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찾아오는 이들의 지친 발걸음을 받아 안는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아내에게 조용히 한마디 건네고 싶어졌다. 다음 제주 여행에는 번잡한 관광지 대신, 저자가 다정하게 일러준 오름의 능선을 함께 느린 걸음으로 걸어보자고 말이다. 지천명과 이순을 지나 칠십의 고개에서 마주하는 제주의 바람은 또 어떤 깊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세상을 향해 거창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젊은이들에게도 좋겠지만, 삶의 속도를 줄이고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따스한 차 한 잔 같은 평온함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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