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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들 - 엄마의 치매와 함께한 12년의 기록
유문향.신재경 지음 / 한국NVC출판사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친구, 친지들을 만나면 집안의 치매환자로 인해 가슴 아프고 가슴 철렁했던 이야기들을 수시로 듣는다. 스토브에 불을 켜둔 채 밖에 나가 화재가 날 뻔 했다거나 하루 전 통화한 자녀를 두고 한 달 째 행방불명이라며 주변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일들은 흔하다.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들>을 읽으며 내내 가슴 한구석이 묵직했다. 일흔의 고개를 넘어서면 주변에서 치매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제의 정정했던 동무가 오늘은 나를 몰라보고, 평생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이가 한순간에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현실은 이제 남의 집 먼 이야기가 아니다. 유문향, 신재경 모녀가 기록한 12년의 세월은 단순한 간병의 기록을 넘어, 언젠가 나 혹은 내 가족이 마주해야 할지도 모를 삶의 한 단면을 미리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치매는 흔히 기억의 상실이자 인간 존엄의 붕괴로 이야기된다. 나 역시 나이 들어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신의 끈을 놓아버리는 일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두 저자는 치매를 그저 비극이나 종말의 시작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치매와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길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고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분투한다. 딸과 손녀라는 두 세대의 시선이 겹쳐지면서, 돌봄은 한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서로를 지탱하는 연대의 과정으로 확장된다.

책 속의 일상은 눈물겹도록 구체적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24시간 멈추지 않는 노동이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이다. 어제는 고마워하다가도 오늘은 불신과 원망을 쏟아내는 환자 앞에서 돌보는 이의 마음은 피멍이 들기 마련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그 고단함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솔직하고 세밀한 기록을 보며 70대의 노년인 나 역시 깊은 위로를 받는다. 치매라는 불청객 앞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 그리고 환자를 돌보면서도 ‘나 자신의 삶’을 잃지 않으려 ‘돌봄과 자기 돌봄의 균형’을 찾아가는 여정은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 나이가 되면 베푸는 삶보다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하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은 동년배들과 만나면 늘 나누는 단골 소제다. 하지만 이 책은 “치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생각을 뒤집어놓는다. 기억은 사라질지언정 그 사람과 함께 나눈 온기와 사랑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의 기억이 파편화되는 와중에도 가족들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노년의 삶을 앞둔 이들에게 커다란 안도감을 안겨준다. 육신과 정신이 쇠락하더라도, 우리가 쌓아온 관계의 끈은 여전히 단단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치매 환자를 둔 가족들만을 위한 지침서가 아니다. 늙어감과 소멸, 그리고 돌봄이라는 인류 보편의 과제를 마주한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다. 치매라는 긴 겨울을 통과하면서도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기쁨과 사랑을 포착해 낸 저자들의 담담한 어조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내 나이 일흔, 기억보다 오래 남는 것은 결국 서로를 품어 안았던 따뜻한 마음뿐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신한다. 삶의 마지막 장을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따뜻하고도 치열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