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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은 가능한가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 아몬드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 나이 일흔을 넘기면서 주변의 부고 소식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젊은 시절의 죽음이 어쩌다 마주하는 비극이었다면, 지금의 죽음은 언제든 내 차례가 될 수 있는 서늘한 일상이다. 친구들과 모이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보다 ‘어떻게 품위 있게 죽을 것인가’를 논하게 된다. 조력임종 찬성 여론이 80%에 육박하고,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되었다는 뉴스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차디찬 병원 침대에서 인공호흡기에 매달려 고통을 연장하느니 내 손으로 깔끔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서구식 ‘존엄’이자 ‘깨끗한 죽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명의 의료·윤리 전문가가 함께 쓴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을 덮으며, 내가 가졌던 생각이 얼마나 얄팍하고 낭만적인 환상이었는지 깨닫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죽음을 미화하거나 감상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암 병동의 정신과 박혜윤 의사, 연명의료를 연구하는 신장내과 신성준 의사, 의료인문학 최은경 교수의 냉철하고도 입체적인 시선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대한민국 죽음의 민낯을 가차 없이 들추어낸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인 75% 이상이 집이 아닌 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는 현실을 짚어낸다. 뉴스를 장식하는 ‘간병 살인’이나 ‘간병 파산’이라는 단어는 우리 세대에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처럼, 내가 아파 누웠을 때 가족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많은 이들이 “돈만 있으면 스위스에 가서 품위 있게 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그 외침이 진정으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지금의 한국식 말기 돌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망의 웅변’이라고 진단한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약물을 먹고 스스로 숨을 끊는 행위 자체일까,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따뜻한 돌봄을 받는 환경일까. 단연 후자다. 결국 조력임종을 향한 뜨거운 찬성 열풍은, 제대로 된 호스피스나 말기 돌봄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사회가 개인에게 밀어붙인 막다른 골목에서의 비명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흔히 내 목숨은 내 것이니 언제 죽을지도 내가 결정하겠다는 ‘자기결정권’을 절대적인 권리로 여긴다. 나 역시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매끄러운 마무리가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라 여겼다. 그러나 책은 그 자기결정권의 이면에 숨은 서늘한 음모를 포착해 낸다.

네덜란드, 캐나다, 미국, 스위스 등 전 세계의 실제 사례를 촘촘히 분석한 저자들은 조력임종이 법제화된 사회에서 죽음의 선택이 어떻게 변질되는지 보여준다. 사회적 돌봄이 부족하고 간병비 부담이 치솟는 환경에서, 노인과 환자들은 점차 ‘살아남아 사회와 가족에게 짐이 되는 죄책감’을 학습하게 된다. “내가 빨리 죽어주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내려진 결정이 과연 온전한 ‘자기결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퇴장이다. ‘깨끗한 죽음’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뒤에는, 효율성과 경제 논리로 취약한 인간을 솎아내려는 현대 사회의 비정함이 숨어 있었다.
이 책이 지닌 독보적인 가치는 단순히 조력임종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유치한 이분법적 논쟁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들은 제도의 도입 여부를 넘어,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살다가 어떤 모습으로 떠나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70대의 눈으로 바라본 이 책은 불확실한 미래를 앞둔 노년층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자 실천적 지침서다. 나이가 들어 체력은 떨어졌을지언정, 삶의 굴곡을 거치며 쌓아온 연륜은 우리에게 현상을 다각도로 뜯어볼 줄 아는 지혜를 주었다. 죽음을 그저 개인의 깔끔한 뒤처리 문제로 축소해 버리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진짜 존엄한 죽음은 약물 한 알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품어주는 사회적 연대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초고령화 사회의 문턱을 넘은 대한민국에서 이 책은 거센 파도 속의 단단한 나침반 역할을 해준다. 내 인생의 종착지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고민하는 동년배 노인들은 물론, 부모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자식 세대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남은 삶의 의미가 선명해진다는 진리를, 이 책은 묵직하게 증명해 내고 있다. 위안을 주는 달콤한 거짓말보다, 뼈아픈 진실을 마주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최고의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