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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섹스의 역사
데이비드 베이커 지음, 김숲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5월
평점 :
미출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일흔을 넘긴 나이가 되면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눈길이 한결 덤덤해지기 마련이다. 한때 삶을 거세게 흔들었던 뜨거운 감정들도, 치열했던 생존의 경쟁도 지나고 나면 그저 흐르는 강물 같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베이커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섹스의 역사>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집필진의 의도대로 단숨에 읽어 내려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나이쯤 되면 ‘성(性)’이라는 단어를 부끄러워하거나 음지의 것으로 치부하는 단계를 넘어선다. 오히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생명력의 본질임을 담담하게 인정하게 된다.
이 책은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가 ‘쾌락’을 진화시켜 살아남았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던진다. 흔히 우리는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처럼 강하고 거대한 존재가 살아남았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진화의 역사가 번식 기회를 얻지 못한 수컷들의 실패담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결국 생존한 것은 힘센 개체가 아니라 ‘성 전략’을 잘 짜고 실천한 이들이라고 말한다. 70 평생을 살며 깨달은 삶의 지혜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세상을 살아내는 데 진정 필요한 것은 무지막지한 힘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고 소통하는 부드러운 전략이기 때문이다.

특히 책에서 주목하는 ‘암컷(여성)의 쾌락’에 관한 서술은 신선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포유류 암컷에게 오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클리토리스가 도태되지 않고 진화해왔다는 사실, 그리고 수컷이 이를 자극하기 위해 음경을 몸 밖으로 꺼내는 진화를 선택했다는 대목은 놀랍다.
“암컷이 짝짓기를 너무 즐겨서 멸종한 종은 없다.”는 이 문장은 성적 즐거움이 결코 죄악이거나 감추어야 할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생명이 이어지기 위한 가장 자연스럽고 숭고한 진화의 열쇠였음을 웅변한다.

우리 세대는 성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특히 여성의 성적 욕구는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인류는 본래 암컷을 만족시키고 서로의 쾌락을 높이는 방향으로 생존을 도모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진화의 순리를 거슬러 제도를 만들고 억압해왔을 뿐, 생명의 역사 20억 년은 줄곧 쾌락과 공존의 편이었다.

저자는 생물학을 넘어 화학, 해부학, 행동심리학, 그리고 역사학까지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종들의 성행위를 파헤친다. 티라노사우루스의 거대한 몸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음경 이야기나, 매력적인 수컷을 차지하려 경쟁하는 암컷 개코원숭이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생명의 다양성에 감탄하게 만든다. 오랑우탄 무리에서 경쟁에 밀려난 베타 수컷들이 서로 동성애적 행위를 나누며 유대를 다지는 모습은, 성이 단순히 번식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개체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고도의 사회적 도구임을 보여준다.
70대의 눈으로 보기에 이러한 생태계의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덕과 규범의 잣대로 보면 해괴해 보일지 모를 행동들이, 대자연의 관점에서는 모두 살아남기 위한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3. 문화의 여운’ 장이다. 인류가 190만 년 전 수렵 채집 시절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배경부터, 고작 5,500년 전 시작된 농경 사회가 어떻게 여성의 성을 단속하고 억압했는지를 다룬 역사적 추적은 매우 정교하다. 사유 재산이 생겨나고 자식에게 부를 물려주어야 했던 농경 사회는 혈통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의 섹스를 통제하고 처벌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전통이라 믿고 살아왔던 가부장적 성 관념과 보수적인 도덕률이, 인류 전체 진화 역사에 비하면 고작 찰나에 불과한 농경 사회의 부산물이었다는 사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은 성은 부끄러운 것도, 탐욕스러운 것도 아니며,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가장 따뜻하고 유쾌한 생존 전략이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세상을 넓고 깊게 바라보고 싶은 동년배 노년들에게, 그리고 성을 그저 쾌락이나 의무로만 여기는 젊은 세대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