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살인사건 - 약이 독이 되는 위험한 화학의 역사
백승만 지음 / 해나무 / 2026년 5월
평점 :
예약주문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약을 마주해왔다. 젊은 시절에는 그저 몸의 고장을 고쳐주는 고마운 도구로만 여겼고, 나이가 들면서는 하루 세 번 거르지 말아야 할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내 식탁 위 약병들에 담긴 알약들은 그저 내 노년의 안녕을 지켜주는 든든한 아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백승만 교수의 <의약품 살인사건>을 읽고 나니, 매일 아침 삼키는 그 작은 알약들이 사실은 생()과 사()라는 아슬아슬한 외줄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저자인 백승만 교수는 약학자의 시선으로 약의 태생은 곧 독이라는 충격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명제를 던진다. 우리 같은 노인들에게 약은 곧 생명줄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생명줄이 언제든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저자는 실제 발생했던 의약품 범죄들을 중심에 두고, 과학적 원리와 자본의 논리,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약을 독으로 변모시키는지 촘촘하게 파헤친다.

 

흔히 우유주사라 불리며 연예계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던 프로포폴부터, 누군가를 깊은 잠에 빠뜨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만든 수면제 살인 사건까지. 책 속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소설보다 더 잔혹하고 현실적이다.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의 추천사처럼, 책은 약물이 인체 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넘어, 그것이 어떻게 범죄의 도구가 되고 또 과학수사의 그물망에 걸려드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인류 과학의 오만에 대한 성찰이다. 저자는 인체가 수억 년의 세월 동안 정교하게 진화해 온 반면, 현대 과학의 역사는 고작 수백 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완벽한 치료제라고 믿었던 약물들이 사실은 인체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불완전성, 바로 그 지점에서 약의 양면성이 발생한다는 설명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칠십 년을 넘게 이 몸을 쓰고 살았어도 내 몸속에서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지 무지했던 나에게, 이 책은 겸손함을 가르쳐준다. 약은 죄가 없다. 다만 그 불완전한 도구를 다루는 인간의 의도가 문제일 뿐이다. 화학자들이 독성을 다스려 약으로 만들었음에도,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다시 그것을 치명적인 독으로 되돌려놓는 아이러니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단순한 화학 교양서를 넘어선다. 범죄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기술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이 흐른다. 나이가 들면 주변에 약을 달고 사는 이들이 태반이다. 우리는 약의 효능에만 매몰되어 그 위험성이나 성질에 대해서는 무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저자는 위험한 사건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이끌며, 진정한 약의 안전한 사용은 그 위험성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스토리텔링이 탁월해 두꺼운 전문 서적 같지 않게 술술 읽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화학 구조나 약리 작용을 실제 사건이라는 그릇에 담아내어, 과학에 문외한인 이들도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든다. 마치 노련한 수사관의 브리핑을 듣는 기분이랄까.

 

책장을 덮으며 다시 한 번 식탁 위 약병을 바라본다. 어제까지는 무심코 삼켰던 알약 하나가 오늘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이것은 나를 살리는 약인가, 아니면 내 몸을 서서히 잠식하는 독인가. 그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사회적 감시 체계일 것이다.

 

이 책은 자극적인 제목 뒤에 묵직한 진실을 담고 있다. 과학이 밝혀내는 진실은 차갑지만, 그 진실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책임감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 관심 있는 이들, 특히 약과 뗄 수 없는 삶을 사는 우리 같은 세대에게 이 책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삶을 지키는 지혜를 전해준다. 약의 화려한 변신 뒤에 숨겨진 서늘한 그림자를 직시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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