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작은 섬 알래스카에서
박은애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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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칠십 평생을 살다 보니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무딘 마음이 생긴 줄 알았다. 익숙한 동네, 수십 년 된 인연들, 그리고 정해진 일과 속에서 평온을 찾는 것이 노년의 미덕이라 여겼다. 그런데 여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단 열두 개의 가방만 든 채 알래스카의 작은 섬 캐치캔으로 떠난 한 가족의 이야기가 내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박은애 저자의 세상 끝 작은 섬, 알래스카에서는 단순히 낯선 땅으로의 이주 기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용기에 관한 보고서다.

 

70대의 시선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떠남의 무게였다. 젊은 날의 떠남은 기회와 정복의 의미가 강하지만, 중년 이후의 떠남은 버림비움의 과정이다. 저자는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신앙과 신념을 따라 알래스카라는 마지막 개척지를 선택했다. 1년에 300일 이상 비가 내리고, 길 위에서 곰을 마주치는 그 낯선 풍경 속에서 저자가 겪었을 당혹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 역시 은퇴 후 조용한 시골이나 낯선 환경에서의 삶을 꿈꿔본 적이 있지만, 언어의 장벽과 고립감을 견디며 정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고행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책 속의 알래스카는 우리가 흔히 매체에서 보던 찬란한 오로라와 설산의 낭만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칠고 습하며, 때로는 지독하게 고독한 현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고립된 시간 속에서 오히려 가족의 의미를 더 깊게 길어 올린다. 곰과 이웃이 되는 법을 배우고, 쏟아지는 비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마치 우리가 노년에 접어들며 신체의 노쇠함이나 사회적 역할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닮아 있다. 저항할 수 없는 환경 앞에서 자신을 깎아내고 적응해가는 그 겸손한 태도는, 삶을 관조하는 노년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연어에 대한 성찰이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삶을 통해 저자는 흔들리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 우리 세대는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작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고 살 때가 많았다. 저자가 알래스카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용감하다는 자기 긍정이다. 이는 비단 낯선 땅으로 떠난 이들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 변화된 환경과 관계 속에서 낯선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 노년 세대에게도 절실한 위로가 된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자신만의 작은 섬에 갇히기 쉽다. 자녀들은 장성해 떠나고, 사회적 유대감은 헐거워지며, 익숙했던 세상은 빠르게 변해간다. 이 책은 그런 우리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고립은 외로움이 아니라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저자가 낯선 알래스카에서 가족과 함께 오로라를 바라보며 느꼈을 그 경외감은, 우리가 매일 아침 맞이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는 가치들이다.

 

문장은 담백하고 따뜻하다. 고난을 과장하지도, 성취를 뽐내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고, 비를 맞으며 걷고,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사소한 순간들을 기록했다. 그 진솔함이 70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도전을 부추기기보다, 지금껏 걸어온 그 길 자체가 하나의 개척이었음을,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낯선 시간들 또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나직이 속삭여준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내가 사는 이 익숙한 동네를 다시 바라본다. 알래스카의 캐치캔만큼이나 이곳도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신비로운 개척지일지 모른다. 저자가 건넨 따뜻한 위로 덕분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걸음에도 조금 더 힘이 실린다.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알래스카를 지나고 있는 연어들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용감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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