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글래디에이터의 세계
스티븐 위즈덤 지음, 문성호 옮김, 앵거스 맥브라이드 일러스트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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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일흔을 넘긴 나이가 되면 세상만사가 그저 덤덤해질 법도 한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여전히 가슴 한구석을 뜨겁게 만든다. 이번에 손에 쥔 스티븐 위즈덤의 <고대 로마 글래디에이터의 세계>는 그 시절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화려하고도 잔인한 글래디에이터들의 실상을 정교한 일러스트와 함께 눈앞에 펼쳐놓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마주한 이 검투사들의 기록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한다.

 

흔히 검투사라 하면 콜로세움의 뜨거운 열기와 황제의 엄지손가락 방향에 생사가 갈리는 극적인 장면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이 그 무대에 서기까지 견뎌내야 했던 일상에 주목한다. 책장을 넘기며 가장 먼저 놀랐던 점은 그들의 훈련 과정이었다.

 

검투사들은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가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한 식단 관리(주로 보리와 콩을 기반으로 한 채식 위주의 식단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와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전문 스포츠인이자 연예인에 가까웠다. 70 평생을 살아오며 느낀 것이지만, 어떤 분야든 정점에 서기 위해서는 지독한 자기 절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죽음이 예정된 운명 앞에서도 근육을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던 그들의 모습에서, 생존을 향한 인간의 무서운 집념을 읽었다.

 


책은 검투사의 종류를 세밀하게 분류하여 보여준다. 투구와 방패로 무장한 무르밀로’, 그물과 삼지창을 든 레티아리우스’, 작은 방패를 든 트라쿠스등 각기 다른 장비와 전술을 가진 이들의 대결은 로마판 가위바위보처럼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특히 풍부한 컬러 일러스트는 글자로만 상상하던 장비들의 무게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눈부신 투구 아래 가려진 그들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누군가는 빚을 갚기 위해, 누군가는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누군가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그 무거운 갑옷을 입었을 것이다. 그들이 든 칼날은 상대를 향해 있었지만, 사실은 자신을 옥죄는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끊어내고 싶었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씁쓸했던 대목은 검투사들을 바라보는 로마 시민들의 시선이었다. 피가 튀는 잔혹한 대결에 열광하며, 그것을 로마의 힘으로 찬양하던 사회적 분위기 말이다. 당시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이 풍경이 현대의 눈으로는 잔인해 보일지 모르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안락함을 누리며, 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는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책은 검투사들이 단순히 죽여야 하는 기계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그들은 때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고, 죽음 앞에서도 품위를 지키려 했던 비장한 인간들이었다. 투기장의 붉은 모래는 그들의 피로 젖었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자유를 향한 갈망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은 고대 로마의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훌륭한 자료집이 될 것이고,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는 거울이 될 것이다. 일흔의 눈으로 본 검투사는 더 이상 잔혹한 전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내야 했던 우리네 인생의 자화상이었다.

 

비록 그들의 무대는 선혈이 낭자한 콜로세움이었지만, 우리 역시 각자의 투기장에서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며 살아간다. 부와 자유를 꿈꾸며 칼을 잡았던 그들의 손을 생각한다.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숨결이 되살아난 것 같아 반가웠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뜨거운 여름날 콜로세움을 가득 채웠을 함성 소리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나직이 읊조려 본다. “치열하게 살았노라, 그리고 끝내 인간이었노라고 말이다. 역사의 먼지를 털어내고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준 이 책은, 내 서재의 한쪽을 묵직하게 채우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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