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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도망 - 까미난떼, 끝인 줄 알았던 순간 다시 걷기 시작하다
나상천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들은 “시간, 건강, 돈” 이 3박자가 모두 맞아야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많은 여행을 해봤지만 산티아고는 가보지 못했기에 산티아고에 대한 책이 있으면 읽는 편이다.
이 책은 걸스데이, 모모랜드, 경서 등 많은 아티스트를 기획하고, 마케팅과 제작을 총괄하며 케이팝 기획자로 오랜 시간 콘텐츠 현장에서 활동해 온 나상천 저자가 평생을 몸담았던 일터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벗어나, 오직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감행한 지혜로운 퇴각과 그 이후의 삶을 담은 인생 에세이다. 저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선택한 네 사람의 여정을 음악과 음식, 여행이 모두 담긴 이야기로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보통 ‘도망’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단어를 인생의 전환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후퇴’로 재정의 한다. 40여 년간 숨 가쁘게 달려온 커리어를 뒤로하고 감행한 그의 도망은, 관성처럼 이어지던 삶의 속도를 늦추고 인생의 본질을 되찾기 위한 결단이다. 이는 사회적 성취를 위해 헌신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이제는 서재와 텃밭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일구어가는 이들에게 깊은 정서적 동질감을 선사한다.

저자는 도망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것이 ‘덜어내기’라고 말한다. 화려했던 명함, 빼곡했던 일정표,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내면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자는 거창한 계획 대신 소박한 일상의 루틴을 채워 넣는다. 정갈한 식사, 느릿한 산책, 그리고 손글씨로 써 내려가는 일상의 단상들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 된다.

이 책은 혼자 있는 시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저자에게 도망친 곳은 외로운 유배지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자신만의 장소’이다. 미술관에서 길을 잃듯 삶의 여백에서 길을 잃어보는 경험은, 오히려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깨닫게 해준다. 사회적 인맥을 정리하는 대신, 자연과의 교감이나 소수의 소중한 인연들과 나누는 깊이 있는 대화에 집중한다.

저자는 결국 ‘멋진 도망’의 종착지가 ‘다시 시작하는 삶’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의 도망 과정을 글로 남김으로써, 방황조차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쇠퇴해가는 체력을 인정하고 몸을 돌보는 정직한 활동에 집중하며, 노년을 축복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마음가짐들을 하나씩 정립해 나간다.
이 책은 인생의 정점에서 내려오는 법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실천적인 제안을 한다. 저자의 문장은 담백하고 솔직하여 삶의 궤적을 복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은 잘 물러나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가장 아름답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명확히 보여준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가 아닌, 자신만의 리듬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완성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