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듣는 법 - 분별과 은혜
김형익 지음 / 두란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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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는 법 서평>

들음과 믿음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별개가 아니다. (115)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열쇠입니다. (116)

기독교인, 믿음을 가진 자들은 정말 많이 읽는다. 혹자는 기독교를 '책의 종교'라고도 할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중점을 많이 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읽는 것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듣는다'.
성경을 혼자, 혹은 공동체에서 같이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우리가 가장 대표적으로 신앙을 키우고, 성장시키는 수단은 
예배 때 듣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이다. 설교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예배시간에서도 절대적인 시간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 듣는 것을 실패한다면? 신앙의 성장은 어려울 수 있다. 

설교에 대한 책은 보통 설교를 하는 법, 설교 잘하는 법', 등의 류인데 '설교 듣는 법'은 그런 의미에서 참신하면서도 신앙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은 참으로 설교가 넘쳐난다고 할 수 있다. 예배 시간 뿐 아니라 SNS나 유튜브를 통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귀로 듣기만 한다고 해서는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정말로 온 삶으로 '들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듣는 법'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목차를 보면 그 내용이 나타난다.
1장에서는 설교 듣기가 왜 중요한지, 설교 듣기가 어떻게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2장에서는 이어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듣는 자이며 듣는 자로서의 부르심이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흔히들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설교를 많이 들어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 부르심이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3장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설교를 들어야 함을 말해주고, 4장에서는 설교를 들었다면 마음에 새기고, 그 설교를 삶에서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5장에서는 설교를 듣는 태도를 말하고 있으며 6장에서는 설교를 듣는다면, 더 구체적으로 자기부인과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7장에서는 설교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장점은 저자의 풍부한 성경강해다. 자신의 주장을 말할 때 성경을 강해하며 주장을 펼쳐나가기 때문에
억지스러움이 없다. 또한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설교를 들음에 있어 통찰을 주고 있다.

책 전반을 걸쳐 읽으며 설교를 듣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며
다시금 신앙생활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또한 설교가 정말로 영광스러운 행위이며 복음을 증거하는 시간임을 다시금 기억해보게 되었다.
설교는 하는 것과 듣는 것 모두 다 정말로 중요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이 영광스러운 시간을 잘 누리기 위해 이 책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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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진심 - 산상수훈을 통해 듣는
스카이 제서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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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말을 진짜 받아들였다면 삶은 달라진다.

이 책은 먀태복음 5-7장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설교, 산상수훈에 관한 내용이다.

너무나 유명한 팔복의 내용, 주기도문을 포함해서 산상수훈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이 책의 기획은 이렇다.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예수님의 말씀이 진담이었다면?"

무슨 말이냐면, 에수님의 산상수훈 설교가 진심이었다면? 이라는 이야기다.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미국(저자가 미국 목사이다)의 많은 복음주의권 그리스도인들이 산상수훈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어둠과 짠내'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교회나 한국교회나 상황이 비슷한 것 같다.

이 쯤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 특별히 산상수훈의 말씀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산상수훈을 진지하게 대하며 진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나눈다.

이것은 기독교윤리학의 큰 방향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수를 삶의 모델로 삼는, 기독론적 기독교윤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존 하워드 요더나 글렌 스타센 같은 이들이다.

이들에게 붙는 형용사는 대부분 "급진적인"이다.

이들 또한 산상수훈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데, 이 부분에 대해 비판을 많이 받는다.

그 이유는 현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신학은 현실에 기초하기보다 영원에 기초한다.

라인홀드 니버 또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러한 신학을 가지고 산상수훈을 해석한다.

다양한 인용구과 균형잡힌 신학들이 산상수훈을 새롭게 읽어준다.

책을 읽으며 놀랐던 점은 부담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 챕터가 굉장히 짧아서 가볍게 읽기 좋다.

어렵지 않다. 청년부에서 함께 읽기도 참으로 좋다.

그러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는 저자의 주장,

그 주장은 묵직하지만 그 담음새는 굉장히 세련되었다.

특별히 저자가 직접 그린 삽화들은 이해를 돕는다. 젊은 사람들에게 더 와닿을 것이다. 예시 또한 젊은 사람들에게 삶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부분(ex-SNS)을 다루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책이 어렵지 않고 분량도 많지 않아 빠르게 읽었지만 빠르게 읽으니 많이 아쉽다.

한 챕터 한 챕터 음미하면서 읽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녹여내면서 읽어야 책을 진정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짧고 쉬워서 청년들에게 추천하기도 좋고, 소그룹에서 한 챕터씩 읽고 나눠도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의 진심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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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 1-12장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하경택 지음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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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혁명 선언>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창세기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너무 과장 아닌가’했지만 읽어보니 저자의 고백이 맞았다. 그녀는 창세기를 통해 신앙의 근본을 배웠다.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란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신앙의 가치를 되새겨본다. 창세기는 선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즉 우주를 창조하셨다 라는 선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최초의 인권 선언, 인간과 동식물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소중한 피조세계를 향한 선언이다.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노동이 신성하다는 선언이다. 칼 마르크스가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셀 수도 없는 오래전, 이미 창세기는 노동의 가치를 긍정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른다.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지만 일에 허덕이는 노예 상태의 인간에게 안식하라! 는 선언이다. 이 모든 선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창세기는 선언이자 사랑고백이다. 연애편지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경작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노동이자 하나님의 창조질서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가꿔나가야 했다. 흔히들 상상하듯 에덴동산은 무위도식하는 곳이 아니었다. 게으름뱅이의 땅이 아니었다.(218) 처음부터 노동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그 곳에서 노동해야 했다. 수많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기 위해 돌아다녔고 가지치기를 해야 했으며 경작도 해야 했다. 지금처럼 노동이 고되진 않았겠으나 탱자탱자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게다.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왜 노동을 하느냐? 당시 설화 ‘에누마 엘리쉬’를 살펴보면, 인간들은 신들이 하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신의 대체용품이었던 것이다. 그 신화에 따르면, 하나의 용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부품 조각 같은 존재였다. 인간은 신을 위해 존재했다. 구약성경은 이 신화와 정확히 반대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신다. 인간을 위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창조된 세계에서 자신의 삶의 영위를 위해 일한다. (219) 이 얼마나 놀라운 인권선언인지 모른다. ‘에누마 엘리쉬’를 비롯, 고대 근동 설화를 보면 하나의 ‘왕’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인간들은 희생당한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기계부품이었다. 비존재였다. 칼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리자면 ‘노동의 소외’가 일어났다. 그런데 성경은 아니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지, 최초의 인권선언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일에 빠져있다 보면 중간에 멈추고 쉬는 것이 그렇게 불안할 수 없다. 계속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쉬면 그르칠 것 같다. 현대사회를 보면 일중독자들이 곳곳에서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빠져나오질 못한다. 창세기는 이러한 사회풍조에 일침을 가한다. “안식하라!”. 하나님께서 쉬셨다. 여섯째 날까지 창조를 하신 하나님은 일곱째 날 안식하신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었고 쉬어야 함을 하나님은 정확히 아셨다. 그 시간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열심히 노동하고 경작하지만,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것을.(225-226) 쉬지 않으면 누가 가장 피해를 입게 될까? 당시는 자유가 없던 가축과 약자들이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쉴 수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갑과 을의 사회’, 한국사회에서 을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형상인데 말이다. 이 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하면서까지 처절히 외쳤던,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말을 떠올려 볼 때, 어쩌면 이 시대에 안식이란, 저항일 수 있겠다.  

노동과 안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의 초록불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뀐다.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모든 것을 깨뜨렸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 사람과 피조세계의 존중이 깨졌고 노동의 신성함이 깨졌다. 하지만 창세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저주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은 뱀과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입히신 ‘가죽옷’, <쿠토넷>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얼기설기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 대조된다. 그렇게 인간은 타락을 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저지르지만,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흥미로운 통찰로 이를 표현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몰아내셨다는 말은, 분명 아담과 하와가 우리처럼 하나님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마자 줄행랑쳤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내쫓고 싶었다면 에덴을 나온 이후 가는 곳마다 우리를 뒤쫓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통쾌한 희망 사전>” <쿠토넷>은 인류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 너무도 극심해졌다. 자칫 하나님의 은총을 가릴 정도로 말이다. ‘마음의 생각하는 바 모든 계획이 항상 오직 악할 뿐이었다.(130, 저자 사역)“. ’ 모든‘.’항상‘,’오직‘ 강조 부사가 세 번이나 들어간다. 얼마나 세상에 악함이 가득했는지를 보여준다. 언어로 형용이 안될 정도로,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을지 모른다. 근데 이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상태가 이상하다. ’ 하나님께서 한탄하신다니(130, 저자 사역)‘ 하나님의 무감동성을 주장하는 ’정통신학‘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구약성서에는 이러한 ’ 신인동감론적‘ 표현이 가득하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예언자들>을 읽어보면, 월터 브루거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파토스(phatos), 정념이 얼마나 강렬한지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무감각하고 무감정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악을 보고 분개하시며, 아픔을 보고 마음 저려하시는 분이다. 후회와 통탄이라니, 너무도 인간적이지만 그분은 그만큼 우리에게 동감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말대로 ”하나님의 전능이란 자기를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전능“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부요함과 영광으로 개방하는 풍성한 사랑으로 재정의하는데, 그분께서 자기의 마음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며 우리에게 통찰을 주는 부분이 또 하나 있다. 하나님은 노아 개인이나 인류만을 위한 언약을 맺지 않으셨다. 노아와 함께 한 생물들이 대표하는 모든 피조물과의 언약이었다.(148) 하나님의 사랑범위는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고 모든 피조물에게 열려 있다. 사실, 이것이 창세기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하다. 그동안 전통 교리는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구속신학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경향이 있었다. 신학의 대상이 오로지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를 면밀히 읽다 보면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 으뜸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피조세계를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피조세계와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라, 선한 목자와 왕의 모습으로 다스려라, 이 말이었다 그래서 강사문 교수는 “‘땅을 정복하라’는 부분을 ‘땅을 가꾸어라’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창세기의 이 말씀은 피조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많은 교회들과 현대 사회의 모습에 일침을 가한다. 대기 오염이 심해지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케쉐트)(147-150)이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은 괜한 우려일까? 그런 면에서 창세기는 인류 최초의 환경선언문이기도 하다. 창세기를 관통하는 이 신학은 ‘보혈과 초록이 보색 대비를 이룸이 온전한 신앙임을’ 보여준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었고 많은 후손들을 낳았다. 창세기에는 그 계보가 나온다. 그리고 계보의 마지막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흔히들 알다시피 ‘믿음의 조상’이라 불린다. 이를 조금 바꿔서 ‘선교의 조상’으로 바꿔도 무관할 듯하다. 구약성서 전체에 하나님의 선교 계획이 나타나는데, 아브라함부터 본격적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쓴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삶은 선교적 삶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한 목적은 아브라함만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후예들, 이스라엘은 열방을 위한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는 구속의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열방이다.(257)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은 오늘날 교회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내부 공동체만 오순도순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회의 목적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러셨듯이 말이다.  

첫 부분에도 말했듯 창세기는 선언이다. 노동에 대한 선언, 선교에 대한 선언, 피조세계의 소중함을 향한 선언, 인권을 향한 선언이다. 내용만 들으면 혁명이라도 일으킬 것 같다. 맞다. 하지만 폭력의 혁명이 아닌, 사랑의 혁명이다. 온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러브레터”인 것이다. 사랑 없고 강퍅한 이 시대에 창세기는 사랑의 편지로 다시 읽힌다. 더불어 고대의 한 문서에 불과할 수 있는 창세기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적실성 있게 들려질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과 저자의 열심인 수고 덕분일 것이다. 창세기를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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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권력에 말하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형국.문은영 옮김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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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죽순이 싹트는 것을 며칠동안 관찰 후 한데 모아놓은 영상이었다. 두터운 지표면을 뚫고 꼬물꼬물 올라오는 그 새싹의 아름다움이라니, 경이로웠다. 무릇 생명력이 넘치는 것은 움트게 마련이다. 추운 겨울도, 무거운 땅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생명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리 또한 그렇다. 정체되어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란 생명력을 가질 때 진리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움직일까? 진리는 죽은 권력에게 외친다.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권력에게 "나 살아있소" 라 외친다. 우리는 그 외치는 소리를 <진리가 권력에게 말하다>라는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 <안식일은 저항이다>등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월터 브루그만은 이제 '진리의 외침'을 말해준다. 


그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통해 그것을 말해주는데, 첫번째로 살피는 인물은 모세다. 우리는 보통 출애굽기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쉽게 읽어버리지만 월터 브루그만은 그 속에 있는 '진리'와 '권력'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바로는 당시 무소불위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노예로 부리며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 백성들은 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야훼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살아있는 권력,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던 바로에게 모세를 통해, 기적을 통해 말씀하신다. 


"너의 권력은 죽었다", "진리를 가진 내가 진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권력이 왜 나쁘냐? 라고 말할수 있겠다. 저자가 말하는 죽은 권력은 바로 전체주의화된 권력이다. 정의와 평화를 입맞출때까지 힘쓰는 권력이 아니다. 가눌 수 없는 탐욕의 절정으로 드러난, 인간을 노예화 시키는 권력이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을 무한대로 부풀리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속에서 팽창되고 있다. 브루그만은 그 권력을 바로의 권력과 연결시키고 있으며 구약성경을 진리와 권력의 대결로 읽는 새로운 독법을 제시한다. 


그 권력에 물들어 버린 이가 있다. 솔로몬이다. 지혜로운 솔로몬으로 흔히들 알려져 있지만 그의 행보는 사실 출애굽 하기 전 바로와 비슷했다. 징세, 사치품들, 축첩, 무엇보다 '값싼'노동력 착취. 애굽의 압제를 떠올릴만큼 무자비했다. 심지어 하나님을 길들이기 위해 , 하나님을 박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성전을 그 어느때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다. 

하지만 진리는 제어되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바로처럼, 모든 절대주의 왕정처럼 솔로몬 왕권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었다. '기만'과 '폭력'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던 솔로몬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지혜', '용맹', 그리고 '부'(wealth)가 있었다. 저자는 그 세 가지 요소가 예레미야가 말하는 '긍휼'(steadfast love), '정의'(justice), '공의(righteousness)'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 말한다. 솔로몬의 탐욕에 의한 권력은 결국 나눔을 통한 정의를 통해 무너지게 될 것이다.ᅠ 


이어 열왕기상,하에 대단히 독특하면서도 인상깊은 인물이 나온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다. 그 대머리 선지자는 인간들의 공동체를 변혁하기 위해 왕정의 감시 밖에서 살았다. 그는 절대왕정, 권력이 가지는 힘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진리를 말하는 능력"을 신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다. 왕가의 역사와 대조적인 대항역사(counter-history)를 살아내며 권력을 위탁받았을 뿐, 사실 허수아비인 왕들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는 왕들에게 도전하진 않지만 왕가의 지위를 전적으로 무시하며 자신의 변혁을 계속해 나간다. 진리란 그런 것이다. 진리란 죽은 권력에 대항해 계속해 살아 움직인다 라는 것을 엘리사는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몸은 심지어 죽어서도 생명을 주었다. 복음의 진리는 새로운 삶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151) 


같은 열왕기하를 읽다보면 예루살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이 나온다. 그는 진리가 사라진 권력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그러나 저자는 그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사례로는 이미 솔로몬에서 다루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아합의 손자 요시야 왕이다. 그는 성전 개혁을 하며 오래된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옷을 찢었다. 회개하고 토라에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개혁에 착수한다. 그 핵심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부채를 면해주는' 것이다.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하는 동시에 사회개혁을 한 것이다. 진리는 관념적이지 않고 공적인 진리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시야 왕에게서 돋보이는 놀라운 점은, 이미 그 자신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절대 왕정 속에서 자라났다. 사무엘상 8장 11절 이래로 몰수와 찬탈의 길이었던 '왕의 길들'에서 떠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182) 그러나 그는 떠났다. 예루살렘의 지배 엘리트들의 이데올로기였던 '억압'과 '폭력'에서 떠나 구약성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정의'와 '공의'로 나아갔다. 

 

월터 브루그만은 성경의 내러티브를 위와 같이 성경의 네 인물, 모세, 솔로몬, 엘리사, 요시야를 '진리'와 '권력'의 대항관계 속에서 살아간 인물로 읽어낸다. 그리고 지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날 우리를 벌벌 떨게 하는 권력은 무엇이냐고. 아마 야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힘이겠다. 심지어 사람들의 시선 또한 우리에게 권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말한다. 우리를 억압하고 두렵게 만드는 모든 인간의 권력은 허구라고. 죽은 거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힘, 권력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라라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진리는 공적 진리이며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로 나타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ᅠ 

나니아 연대기가 떠오른다. 아슬란이 나타나기 전, 나니아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얼음 마녀였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절,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슬란이 나타나자 세상이 바뀌었다. 나니아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고 점점 봄이 찾아왔다.그러면서 얼음마녀의 지배가 허구라는 것이 드러났다.ᅠ아슬란에게는 생명이 있었다.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거다. 우리를 옭아메는 모든 죽은 권력을 뿌리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생명의 진리가 외치는 대로,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자고 노신학자는 목소리를 높여 우리를 촉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도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이미 죽은 것이 드러난 권력에 붙어 살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끝까지 읽게 되면 살아있는 진리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솟아 오른다. 부디 다른 독자들도 이 경험을 하길 바란다.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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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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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판 전부터 굉장히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이였고 결과적으로 기대를 충족시킨 좋은 책이었다. 
유시민씨 이름은 많이 들어봤고 책을 많이 낸 것도 알았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왜 '지식소매상'이라 불리는지 알겠다. 전달하기 쉽지 않은 내용들을 술술술 풀어 설명하는 그의 글쓰기는 꽤 두껍고 그림도 없는 이 책에 빨려 들어가 읽게 해주었다.

이 책은 유시민씨가 태어난 1959년부터 2014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한국현대사의 사건들을 낱낱이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지 않았다. 이 책에서 나오는 사건과 역사들은 유시민씨가 "2014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상황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실"이라고 판단한 것들이다. 읽으면서 그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과거의 역사들은 지금의 모습과 굉장히 닮아있었다. 그 정도가 다를 뿐 사건의 본질은 같은 것을 보며 소름끼치기도 했고 두렵기도 하고, 무력하기도 했다.

이 책의 인상적인 점은 꽤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자유주의자'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인간의 자유를 중요시여기고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끔찍히 싫어한다. 집단의 힘으로 개인을 묵살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유주의자이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집단우선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상을 가지면 대개 진보라 불린다. 하지만 그는 꽤 객관적으로 역사의 명과 암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극과 극으로 평가가 갈리는, 그가 사상적으로 굉장히 반대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가 장관을 지냈던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꽤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다. 객관과 주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1959년부터 지금까지. 정말 쉽고 잘 정리해놓았다. 특히 민주화운동부분은 저자가 직접 참여해서 그런지 굉장히 자세하고 면밀하게 소개되어있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없더라도 대한민국 현대사가 알고 싶다면 꼭 읽어봐야하는 책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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