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정리독서법 -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나를 성장시키는
복주환 지음 / 천그루숲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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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정리독서법》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그야말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말끔한 구성이었다. 생각정리 전문가답게 수많은 책내용이 흐트러진 데 하나 없이 제자리에 각 잡혀 반듯하게 놓였다. 목차는 그대로 핵심 중의 핵심이었고, 쉽게 지나쳐도 될 만한 챕터는 전혀 없었다. 독서 관련 궁금증들이 모두 풀려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알짜 정보가 가득하다.


나도 서평을 쓰기에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조금은 안다. 글 한 편을 쓰는 것도 힘든데, 한 권의 책을 이토록이나 정갈하게 차려내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큰 정성을 들인 건지 상상도 못하겠다.


챕터 제목과 소제목을 중심으로 부연 설명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문체도 쉽고 간결하기 그지없어 소설도 아닌데 술술 넘어간다. 그야말로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이 잘 차려진 26첩 반상이다.(소챕터가 26개다.)


《생각정리독서법》 제목을 접하고, 이 책은 어느 정도 독서 경험이 쌓인 독서가에게 필요하겠구나 짐작했다. 사실 책을 읽으며 생각까지 따로 한다는 건 쉽지 않다. 활자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하지만 초보독서가들에게도 자신 있게 《생각정리독서법》을 추천한다. 중학생도 읽을 만큼 쉽게 쓰인 이유도 있지만, 처음부터 올바른 독서 태도를 배우고, 책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것은 광활한 독서의 세계를 헤매지 않는 데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생각정리독서법》은 나와 통하는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독서법 책 중 가장 크게 공감하며 읽은 책이다. 그동안 쌓아온 독서 개념들이 비슷했다.


일단 책과 친해져야 한다는 것, 책을 사람으로 보고 대화하듯 읽으려 하는 것, 책을 곧 내 주변 사람으로 보는 것, 특히 존경하는 김정운 박사님이 말씀하신 "슈필라움"(나만의 아지트)을 언급하며 읽는 공간에 대한 애정까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듯, 《생각정리독서법》을 읽으며 같은 생각을 담은 독서 관련 문장을 읽는 기쁨도 정말 컸다.



《생각정리독서법》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 내용을 자신의 생각과 연결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마인드맵, 만다라트, 로직트리 등 다양한 도구로 생각을 시각화하고 정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추상적인 생각들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는 데 유용한 방법들을 천천히 하나씩 실천한다면 큰 발전이 따를 것이다.


독서와 생각, 기록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책, 《생각정리독서법》으로 독서라는 어마무시한 파워를 장착할 수 있길!



"그거 아시나요? '멋있다'는 말은 '무엇이 있음'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멋있다'는 말을 길게 말하면 '무엇이 있다'로 들리나 봅니다. 독서를 통해 당신만의 '무엇'이 생겨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290면



*** 출판사 천그루숲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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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수록 선명해진다 - 내 안의 답을 찾아 종이 위로 꺼내는 탐험하는 글쓰기의 힘
앨리슨 존스 지음, 진정성 옮김 / 프런트페이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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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5분 동안
엉망진창이고 날 것 그대로인
글을 썼을 뿐인데
'아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30년 넘게 출판계에서 편집자, 출판경영인, 팟캐스트 진행자, 강연자로 활발하게 활동해 온 《쓸수록 선명해진다》의 저자 앨리슨 존스. 어느 날 새벽 3시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준비하며 돈에 쪼들리던 저자는 금방이라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천운이었을까. 일단 떠오르는 행동을 하자 한 것이 공책을 편 것이었다.


난장판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공황이 어떤 느낌인지, 몸의 어떤 부위로 찾아오는지를 적었다. 그러는 동안 몸 상태가 바뀌는 걸 느낀다. 생각과 함께 쓰는 속도도 느려지며 호흡도 돌아온다.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렇게 2주 후, 새로운 프로그램을 론칭한 덕분에 저자는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그 순간 저자는 '탐험 쓰기', 자신을 위한 글쓰기의 힘을 발견한다. 《쓸수록 선명해진다》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 "글쓰기의 전복"이다. 매일 블로그 포스팅을 하려고 하얀 화면을 마주하지만 매번 처음 같은 막막함을 느낀다. 드넓게 펼쳐진 흰 여백 앞에서 순백의 뇌가 되는 기분은 어쩜 그리 한결같은지. 하지만 탐험쓰기는 글을 쓰는 흰 종이를 두려움으로 올라가는 연극 무대가 아닌 설렘과 기대로 펼쳐진 미지의 땅으로, 아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아닌 모르는 것을 탐색하는 기회의 장으로 뒤집어버린다. 안전하고 사적인 공간, 절체절명의 순간에 간절히 바라는 물건으로 가득 찬 마법의 방으로 보게 만든다.


작가들은 의외의 이유로 글을 쓴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뭔가를 이해해 나가는 한 방법입니다. 특히 제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누군가가 '이 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잘 모르겠군요. 아직 그 문제에 관해 글을 써보질 않아서요'라고요." 무려 다니엘 핑크의 말이다.


글쓰기가 어려웠던 주된 이유는 쓸 게 없어서였다. 아는 게 없고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강제로라도 쓰기 위해 서평단 활동에 열심이었다. 읽은 책을 재료 삼아 그나마 쓸 수 있었다. 생각이 정리된 후에 그럴듯하게 준비된 상태의 '마지막 단계'가 쓰기라고 오해했다. 영리한 작가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첫 단계'에 쓰기를 두고 있었다. 생각을 만들고, 바꾸고, 전환해 명확하게 다듬는 모든 과정이 쓰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가 끝난 후 쓰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기 위해 쓰는 거였다. 알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쓰는 거였다. 이해가 끝나서 쓰는 게 아니라, 이해해 나가기 위해서 쓰는 거였다.


《쓸수록 선명해진다》가 전하는 '탐험쓰기'는 프리 라이팅이나 저널 쓰기 같이 이미 알려진 글쓰기와 비슷한 궤를 갖는다. 의식의 흐름대로 감정과 생각을 자유롭게 쏟아내는 글쓰기이지만 탐험쓰기만의 2가지 특징이 있다. 6분이라는 시간제한과 질문 중심의 글쓰기라는 것.


쓸 주제가 있다는 것과 짧은 시간이라는 틀이 집중력과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질문 중심의 탐색을 통해 자기 성찰과 사고 확장을 끌어준다. 나침반과 지도를 가지고 정해진 시간 동안 탐험하는 것 같았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되, 질문이라는 나침반이 방향을 제시하고, 6분이라는 시간제한이 탐험의 범위를 한정해 경험해 보지 못한 집중력을 발휘하게 돕는다.


혁명과도 같은 쓰기의 놀라운 비밀을 알았다고 저절로 써지는 것은 아니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알았으니 이제는 직접 써봐야한다. 감사하게도 출판사 프런트페이지에서 <탐험쓰기 챌린지>를 진행해 주셨다. 30명의 행운아 탐험쓰기 멤버들이 단톡방에 모여, 평일 2주간 10일 동안 같은 질문에 답하는 6분 탐험쓰기를 함께 떠났다. 나는 아이들과도 같이 쓰며 가족 단톡방에서 챌린지를 공유했다.


6분이라는 시간의 힘은 대단했다.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겨우 6분이라는 짧은 시간 앞에 변명을 할 수 없었는지 끝까지 따라와주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자체 모자이크를 해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휘갈겨 쓴 아이들의 노트 실루엣이 인증샷으로 올라올 때마다 정말 기뻤다.


6분이라는 시간과 종이와 펜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어디에? 쓰기가 어려운 분들을 위해 《쓸수록 선명해진다》는 <일단 첫 마디> 챕터에 질문과도 같은 첫 문장들을 제공한다. 든든하다. 그중 하나를 골라보자면, "지금 나의 내면에 있는 '최고의 나'가 하는 말은..." 지금 당장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자신만의 글을 6분 동안 써보길 강권한다. 6분 동안 생각이라는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글자들이 들려주는 새로운 당신 자신을 만나보라.



*** 출판사 프런트페이지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쓸수록선명해진다 #앨리슨존스 #프런트페이지 #탐험쓰기 #6분글쓰기 #글쓰기책 #글쓰기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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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박완서 산문집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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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부터 출판사 문학동네는 "박완서 산문집"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행운처럼 10년이 되는 해에 10번째 책인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출간됐다. 2005년 실천문학사에서 발간한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재편집하여 미출간 원고 5편을 수록하며, 박완서 여행 산문집의 완전판으로 세상에 나왔다.


박완서 선생님의 맏딸 호원숙 작가님께서 서문을 쓰셨다. "어머니가 어딘가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쓰신 게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런 것치고 어머니는 여행을 참 많이 다니셨기에." (4면)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 말씀이 괜히 반가웠다. 좋아하지 않는 여행을 박완서 선생님은 왜 그리 많이 다니셨을까?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남한산성과 강릉부터 중국 만주, 몽골, 백두산을 거쳐 바티칸, 에티오피아, 티베트 등 국내외 곳곳을 다닌 여행산문이다. 주로 1부에 미출간 원고 4편이 모여있는데, 그래서인지 국내를 다니며 소소한 일상을 여행기로 쓰신 글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의 깊은 통찰과 높은 시선에 감탄했던 행복한 독서였다.


늙는 거란, 엄두가 안 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거로구나. 요즘은 도통한 것처럼 그렇게 체념하고 있다.
- 14면


치욕도 파묻어두기보다는 드러내놓고 기억하고자 한 것은 확실히 성숙한 생각이고, 어느 만큼 잘살게 됐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게 거기 있음에 관심이 없다면 그건 거기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17면


산엔 겨울만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봄도 가장 먼저 와 있다. 이미 얼음장을 녹여버리고 마음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의 어울림은 활기찬 봄의 소리였다.
- 18면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서 가장 사랑하는 글은 "내 나름으로 누리는 기쁨"이었다. 친구분과 번개 여행으로 비행기로 강릉을 간 이야기다.
"그날 하루만은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시간 붙들어 매놓은 것처럼 늑장을 부리자는 약속을 깨고 우리는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 될 수 있으면 잘하는 집 앞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했건만 기사가 내려준 집은 잡화상과 순두붓집을 겸한 볼품없는 구멍가게였다."
주인이 서울서 비행기 타고 이 순두부를 먹으러 왔느냐 물으며 "아짐씨들은 참말로 호강허네요" 기분 좋게 건네는 말에 선생님은 "호강"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신다. 편안함, 호화로움, 남이 부러워할 만한 일 등이 호강이라 생각할 때 그날의 여행은 온통 호강이었다.


남 나름으로 생각하던 걸 내 나름으로 생각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외의로 많다.
- 26면
호화판 호텔 뷔페는 남의 기준으로 보면 호강이겠지만 비싼 음식값이 부담 돼서 많이 먹어야지 벼르고, 손해를 덜 보려 시가로 비싼 음식을 고르고, 돈 생각해서 먹어두는 강박관념은 궁상의 극치지 결코 호강일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을 세워 주체적으로 살라는 의미를 이렇게나 편안하게 입에 붙는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하신 점이 정말 놀라웠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 글을 읽는다기보다 말을 듣는 기분,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누워서 듣는 기분이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 술술 풀어놓는 구수한 입담에 활력이 살아 넘친다. 말 같은 글을 읽으며 어쩜 이렇게 자연스럽게 문장이 흘러 흘러나올까 신기하고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소설보다 산문에서 선생님의 문장력을 더 가깝게 피부로 느끼는 것 같다.


왜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이 사랑을 받을까 힌트도 얻었다. 일상의 자잘한 문제에서 가치를 건져 올리는 관찰력과 통찰력이 실로 놀라웠다. 선생님은 숨어서 볼 수 없는 삶의 보석을 기가 막히게 캐내, 장인의 솜씨로 다듬어 글로 내놓는 뛰어난 세공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에 풍화되어 낡고 소멸해가는 것들을 연민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발견하는 그 시선을 따라가노라면 공감하지 않고는, 마음을 뺏기지 않고를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무쇠를 저렇게 거울처럼 길들일 수 있는 아낙이 조선의 아낙 말고 어디 있을까, 가슴이 찡했다. 윗방 윗목엔 옷장이 놓여 있는 여러 쪽으로 나누어진 문짝마다 미남 미녀들의 천연색 사진으로 도배를 해놓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지금보다 십여 년은 더 젊었을 적의 유인촌, 이영하, 신성일, 신영일, 한혜숙, 김자옥, 선우은숙, 유지인, 홍세민의 모습을 확인했다. 우리나라에서 배우가 가장 인기 있었을 적 달력 사진인 듯했다. ...... 벽에 써붙여놓은 가갸거겨 줄로부터 하햐허혀 줄까지의 백사십 자의 한글이었다. .......
나는 그의 아내가 끓인 된장찌개로 밥 한 사발을 비우면서, 여기 이 사람보다 더 위대한 민족주의자가 있으면 나와보라지, 하고 외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84, 85면


이 시대의 어른으로 삶의 본질을 전해주는 메시지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그중 특히 감명받았던 문장, "꿈을 꿀 수 있는 한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 만일 그런 꿈도 없다면 무슨 맛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쓰고 남는 건 저축도 하고 최소한의 경제생활이나마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꿈을 꾸기 위해선 먼저 감정이 독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꿈처럼 독창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 31면)
감정이 독자적이어야 한다니, 꿈처럼 독창적인 것도 없다니...! 흔한 단어로 차원이 다른 의미를 담아내는 솜씨에 정신이 어질했다.


그 속에는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담고 싶은 진심이 녹아있었다. 가감 없는 진솔한 자기고백들에 내 마음까지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의 그 큰 여행 가방 안에는 1980년대 내 나라의 궁핍과 나의 나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 내 가방을 열어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경멸했을 생각을 하며 오랫동안 심한 수치감으로 괴로워했다. 그 후에는 여행을 떠날 때 절대로 양말이나 속옷을 많이 가져가지 않고 그날그날 빨아서 입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 49면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으로 선생님의 기억과 경험을 삶의 맥락에 연결해 치열하게 현실을 탐색하고 모색하는 부단함을 배웠다. 시대의 슬픔과 상처를 삭히며 성숙으로 나아가고, 그 모든 것을 글로 쏟아내며 치유하는 선생님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음이 축복이라는 걸 알았다. 글로 삶을 비추어 읽는 이들이 발붙인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어른을 언제든 책으로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선생님은 세상과 사람을 잇도록 태어난 사절단이 아니셨을까.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글을 쓰신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글은 올바르게 살도록 받쳐주는 힘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곧 선생님의 됨됨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이었나보다. 책보다는 박완서라는 한 사람으로 자꾸만 초점이 모아진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의 여행들은 편견에 갇혀 정체되지 않기 위해, 항상 유연하고 열려있기 위해 애쓴 선생님의 발걸음들이 아니었을까. 남다른 감각과 관점으로 낯선 곳에서 길어 올린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무감으로 쉬지 않고 기록하신 건 아닐까. 삶을 살듯 여행을 다녀오며 점점 확장된 사유와 통찰을 부지런히 남겨주신 선생님의 모든 시간에 감사드린다.


박완서의 여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글 속에서 세상과 사람을 구경하고 나를 새롭게 인식하며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즐거운 독서가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 있다. 기나긴 설 연휴 동안 읽기에도 더없이 좋은 책, 모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출판사 문학동네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만여행자가될수있다면 #박완서 #문학동네 #박완서여행산문 #미출간원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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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 소설, 향
최정나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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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작가정신의 서포터즈로 10월부터 3월까지 활동하고 있다. 올해 처음 받은 작가정신의 책은 《로아》라는 예쁜 이름의 제목과 다르게, 결코 예쁠 수 없는 아동학대를 그린 중편소설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폭력, 그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힘없는 존재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이야기한다.


7살 로아는 14살 친언니에게 참혹한 학대를 당하며, 언니가 결혼하는 날까지 끔찍하게 살아간다. 군중의 폭력을 응시하는 작품으로 주목받던 사진작가 아버지는 자살하고, 자신 외에 소중한 것이라곤 없던 엄마는 두 딸을 방치하는 데다 학대마저 방관하며 자기합리화 속에 살아간다. 폭력의 가해자, 언니 상은은 극심한 애정 결핍과 외로움으로 모든 삶의 에너지를 로아에게 분출한다. 로아를 괴롭히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 같다. 유일하게 자기 편이라고 여긴 로아를 폭력으로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소유하려 한다. 파괴적인 폭력을 사랑으로 포장해 최선을 다해 자신과 주변의 모든 세계를 지옥으로 만든다.


《로아》는 매우 교묘하고도 다층적인 폭력의 참상을 세심하게 밝힌다. 신체적 폭행은 물론이고 정신적, 언어적인 가스라이팅으로 어린아이의 내면세계를 무참히 밟는다. 그 악랄함에 혀를 내둘렀다. 책 초입에 이러한 경고 문구를 일러두는 책은 처음이다. "본문 중에 다소 폭력적이고 잔인한 표현이 있을 수 있어, 이와 관련된 정신적 외상이 있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폭력의 본질을 파헤쳐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인 만큼 중요하게 다뤄야 할 내용이지만, 그저 가상의 소설로 치부하고 읽기가 어려웠다. 평소 이런 장르의 콘텐츠를 유독 힘들어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장면들에 두통이 올 것 같았다. (19금일 정도로 일반적인 수준을 넘지는 않는다. 15세 이상 독서 추천)


"집에서 얼어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쯤, 욕조에 차가운 물을 한가득 받아두고 로아를 불렀다. 욕실 앞으로 조르르 달려온 로아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욕하자."
나는 내가 만든 세계를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로아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로아는 겁이 나는지 눈만 끔뻑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걸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언니 말을 잘 들어야지."
나는 로아를 잡아채 그대로 발가벗겨서 욕조로 밀어 넣었다. 로아는 기겁해서 물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물러서면 안 되었다. 나는 어깨에 힘을 실어 로아의 머리통을 물에 처넣었다. 한참 만에 물 밖으로 얼굴을 내민 로아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괴로워하는 로아를 보니 희열이 피어올랐다."
- 19면


"나는 네가 되어본다. 언니가 되어 나를 본다.
너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본다."
《로아》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의 객체와 주체의 완벽한 전복"을 그린 독특한 시점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로아가 언니의 입장으로 과거를 복기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반부를 읽을 때까지도 이러한 설정을 공감하지 못했다. 고통스럽기 그지없던 어린 시절의 한복판을 굳이 언니로 돌아가야 했을까?


"이 회귀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밝혀두고 싶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내 마음을 편히 하려는 게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보려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 내게 그리고 내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것을 마주하고, 거대한 벽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나를 둘러싼 세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봐야 했다. 거기서 새로운 씨앗이 움틀 거였다.
- 12면


가해자를 이해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로아》는 "이해"라는 길의 반대편을 향하고 있음을 줄곧 강조한다. 계속 생존하기 위해, 나로 살아가기 위해, 과거가 가로막은 현재의 벽을 부수기 위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이해를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써 나를 이해하려는 로아 자신을 위한 시도였다.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 다른 이의 눈으로 낯설게 볼 때, 볼 수 없던 걸 보게 될 것이었다. 가정 폭력의 구조적 문제와 사회의 무관심과 무책임, 전염되고 대물림되는 폭력의 입체적인 면모들까지 표현된다. 폭력을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였던 것이다.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인식의 대비가 괴리감을 만들며 복잡다단한 폭력의 현실을 낱낱이 비춰준다.


《로아》는 전형성으로 상은의 실체를 명명한다.
"상은의 세계는 슬픔의 실체는 없고 자기 연민만 가득했다. 타인은 없고 자신만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없는 세계,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이용 가치에 따라 선과 악이 바뀌는 세계, 그 안에서 모든 걸 통제하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기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상처도 슬픔도 모두 전형이다. 전형적인 사고에 갇힌 자에게 자기 언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생각도 없고 변화도 없는 세계, 고작 그런 세계, 고작 그런 사람, 나를 불안에 떨게 했던 이의 실체" (144면), "남을 괴롭히면서 이미 죽어 있는 자신을 한 번 더 죽이"는 사람이 상은이었다. (148면)


언니 상은을 조금도 이해하고 싶지 않게 선을 지켜주신 작가님께 감사했다.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함으로 그 편에 슬쩍 마음 한 조각을 건네는 연민의 순간은 없었다. 상은은 나름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하지만, 피해자의 증언은 분명했기에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애정 결핍과 방치로 상처받음으로 폭력을 끝없이 내면화하고 세상에 대한 방어 기제로 나약함을 지키려 했다는 모든 이유가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니의 메커니즘으로 로아 자신을 보는 눈에는 언니의 시선이 녹아들 수밖에 없다. 그 혼돈한 경계에서 나는 로아가 언니의 마음을 다 알듯이 서술하는 그 자체가 한편으로 섬뜩했다. 가해자가 되어 상상에서 자신을 해하고, 또다시 고통 당하며, 가해자인 언니를 추측하며 극단으로 몰아감으로써 자신이 가해자가 되는 무한반복의 고통. 폭력으로 배우고 자가발전하며 세상의 이치를 비틀어 깨닫는 역겨운 인간이 되기가 얼마나 끔찍했을까. 작가님께 이 마주하기는 독자인 내가 읽어내기 힘들었던 고통의 수십 배가 넘도록 컸을 것 같다. 문장마다 서린 독기로 짐작할 수 있었다. 상은과 상은이 만든 무질서한 무자비함을 얼마나 버티기 힘들었을까.


한편으로 독자로서도 혼란스러운 지점이 있었다. 로아이면서 상은이기도 한 시점ㅣ지만 둘 다도 아닌 불분명한 자리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말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금지된 재현>을 언급한 것 같다. "로아는 금지당한 재현을 시도한다. 산산이 부서져 수많은 로아가 된다. 로아이면서도 로아가 아닌 모습으로, 새롭게. 동시에 그것을 보는 하나의 시선이 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치자."


아이였던 로아의 순수한 시선과 언니의 폭력성이 뒤섞인 문장들 중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가름하기가 어려웠다. 가해자의 시선은 본 기억은 결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닐 것이다. 기억은 주관적이고 불완전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된다. <금지된 재현>에서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로아》의 폭력에 대한 기억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변형됐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혼란스러울 금지된 재현을 시도한 덕분에, 《로아》가 던지는 질문은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했다. 많은 질문을 내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로아》는 탁월하다.


마지막으로, 회피에 관해 말하고 싶다. 아이들의 엄마인 기주와 상은은 극도의 회피 성향을 보인다. 나는 이 참극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 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들의 문제를 알면서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크면 달라질 거라는 막연함으로 기가 막힌 방치와 방관으로 머문다.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튀김 기름이 시커멓도록 오래되어도 끝까지 교체하지 않는 것처럼. 남자와 쾌락으로 도망가고 피하며 온갖 핑계를 대어 아이들을 개선하려 적극적인 시도는 전혀 없다. 끔찍하게 무력하다.


상은 또한 마찬가지다. 괴상한 논리로 동생을 괴롭히며 애착을 두는 것으로, 자신을 방치한 엄마에 대한 분노와 복수로 남 탓만 하며 세상에서 도망간다. 폭력과 파멸만 가득한 섬에 로아를 가두고 곁에 두려워 할 뿐, 자신이 발 디딘 세계와 자신을 전혀 들여다보지 못한다. 회피와 공격 성향이 만나면 비극이 된다는 것을 이보다 소름 끼치게 그린 작품이 있을까.


작가정신의 서포터즈 작정단이 되지 않았다면 내 손으로는 절대 선택하지 못했을 이야기다. 힘들어도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몰입감이 결말까지 가도록 끝까지 밀어준다.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장과 촘촘한 서사의 맥락이 주는 힘이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듯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구성과 깊은 관념이 매력적으로 얽혀 (이런 표현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폭력의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탐구하길 좋아하는 분, 개성적인 문체와 독특한 서술 방식을 선호하는 분, 여운이 남는 결말을 좋아하는 분에게 추천하고 싶다.



*** 출판사 작가정신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로아 #최정나 #작가정신 #작정단13기 #작가정신서포터즈 #소설향 #중편소설시리즈 #폭력 #폭력의근원은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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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더 귀하다 - 아픔의 최전선에서 어느 소방관이 마주한 것들
백경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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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더 귀하다》는 8년 차 소방관 구급대원인 저자 백경이 마주한 가난, 고통, 죽음의 현장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픔의 최전선에서 어느 소방관이 마주한 것들"
부제목에서 밝히듯, 저자가 소방관이라고 해서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긴급 구조하는 현장이 등장할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소방공무원은 구급대원,
화재진압대원, 구조대원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하니, 《당신이 더 귀하다》의 저자는 앰뷸런스를 타는 "구급대원"이다.


사실 《당신이 더 귀하다》 서평단 당첨 소식을 듣고 놀랐다. 내 기억으로 나는 이 책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기 두려워 마음을 닫아 건 사람들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간절한 심폐소생술"이라는 추천사가 딱 나였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두려웠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괴로워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신이 더 귀하다》가 내게 왔다.


프롤로그를 읽고 《당신이 더 귀하다》에 다가가기 주저했던 마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일반인이었던 작가의 첫 책이어서 사실 문학작품으로 갖는 기대치는 낮았다. 프롤로그 단 2장만 읽었는데 깜짝 놀랐다. 시적이고 담담하게 풀어간 문장들은 깊고 깊었다. 보통 사람의 글이 아니었다. 책장이 왼쪽으로 쌓이면서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더 귀하다》는 글이라기보다는 파도 치던 저자의 삶이 고요하게 가라앉은 그 때를 그저 종이에 옮겨놓아 여전히 물결 치는 바다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현실로 살아가는 자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삶으로 쓴 기록이었다.


이렇게 《당신이 더 귀하다》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라도 읽기 쉽게 간결하게 쓰인 뛰어난 가독성 덕분이다. 또, 현장감 있는 생생한 경험 서술과 대문자 F이실 것 같은 세밀한 감정 묘사 덕분에 몰입감까지 높아 책을 중간에 덮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신파적이거나 감정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담담하게 울리는 진솔한 삶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의외였던 점은 "사건"이 아닌 그 안에 "사람"을 중심에 둔 책이라는 사실이다. 구급대원의 경험은 일반인에게 생소하기 때문에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쉬웠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자극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글로 오히려 책에 대한 화제성은 높아졌겠지만 《당신이 더 귀하다》는 아픔의 최전선에서 마주하는 현실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렸다. 극적인 사건을 통해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기보다, 소방관이 일상에서 겪는 고뇌와 만나는 사람들의 아픔에 집중한다. 사회의 아픔을 '특별한 비극'이 아닌 '세상의 일부'로 '우리의 일부'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당신이 더 귀하다》가 "언제 죽을지 몰라서 쓰는 글"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급차를 몰고 간 곳에는 자주 비가 내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빗물에 흠뻑 젖어 집 안까지 비구름을 몰고 왹에 이르렀다. 잘 크고 있는 아이들이 사고를 당해 죽거나 크게 다치는 상상을 했고 아내가 기분이 안 좋은 날엔 그걸 자살의 전조라고 여기며 불안에 떨었다. 일하는 동안은 내가 오만가지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장면을 떠올렸다. 고속도로에서 구급 활동을 하다가 차에 치이거나, 정신질환자의 칼에 맞거나, 또는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에 마음이 무너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그래서 틈날 때마다 유서를 썼다. 잡힐 듯 말 듯 한 죽음에 먼저 손을 내민 일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 5면


살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글은 삶은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과 분들어야 할 것들이 분명해진다. 사람은 붙들어야 할 것이었다. 인간성을 가진 어떤 삶도 가치 있기 때문에 저자 자신의 삶 또한 가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유서가 삶의 위로가 된 것이다. 기운을 차린 저자의 눈에 그가 만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이 기록에 드러났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은 무게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닫자 마침내 비구름이 걷혔다. 애초에 그건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가난하고, 아프고, 죽음을 앞두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힘껏 살아가고 있었다," ( -6면)
"빗줄기를 뚫고 달리는 이른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기는 것과 비슷하다. 시작은 시야를 흐리는 비참한 광경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쓰면 쓸수록 들어나는 뜨거운 삶으로부터 진한 감동을 받는다." ( -7면)


작가님은 바란다. 《당신이 더 귀하다》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대신 같은 체온을 가진 인간이라 생각하면 좋겠다고. 그 진심이 책의 곳곳에서 표현된다.
"누군가 가난과 외로움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같은 말로 포장하는 건 눈앞의 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손바닥 뒤엔 분명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 부서져라 내 손을 쥐는 모습에서 나는 분명 나와 같은 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언제라도 다시 만난다면 또 손을 내밀 것이다.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 35, 36면


《당신이 더 귀하다》를 읽으면서 여러번 울었다. 계속 읽어가는 데에 용기가 필요했다. 작은 일에 힘들어하고 웃음 짓던 지난 날의 내가 왠지 부끄럽고 우스웠다. 각자 삶의 무게는 다르지만, 각자가 느끼는 아픔의 무게를 비교해선 안 된다고 고상한 척했던 나는 치졸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인생들이 여기 처참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 놓지 못하는 손과 망부석처럼 맨발로 구겨 넣은 털신이 있다.


"추우니 들어가시라 말해도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털신에 맨발을 구겨 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더는 커피 마시란 얘기는 않았지만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또 한 번 눈을 맞추기 겁나서 고개를 돌렸다. 출동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소복한 눈길 위에 구급차가 지난 바퀴 자국 말고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 그걸 보니 무엇 때문에 할머니가 이 먼 곳까지 떠나왔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곧 내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아마 할머니가 떠나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를 떠나갔을 테니까. 그러므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할머니를 떠났는가, 그렇게 묻는 것이 옳은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언젠가 할머니도 하얀 눈으로 뒤덮인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나서, 할머니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엄마나 아빠, 친구들, 운이 좋으면 사랑해 마지않았던 어떤 한 사람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허벅다리가 따끈해지는 아랫목에 모여서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실 것이다."
- 22, 23면


가끔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더 귀하다》는 극적인 서사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을 깊이 표현한다. 슬픔과 분노, 따뜻함과 희망 같은 다양한 감정을 차분하게 전하기에 오히려 더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비유와 은유로 현실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님만의 문학적 표현과 감수성도 아름다웠다. 저자의 회상과 생각들이 현장의 시선과 교차된 방식도 일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당신이 더 귀하다》 같이 아픈 글을 왜 읽어야 할까.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창이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의 불평등, 차별, 제도적 허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픈 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연대 의식을 갖는 것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의무임을 깨닫는다. 일상에 매몰돼 좁아진 시야를 넓히고, 세상의 다양한 구석들을 돌아보며, 다함께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이 《당신이 더 귀하다》 같은 작은 이야기 속에 크게 숨어 있었다.


겁을 먹고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을 덮으며 단단하게 덮혀진 마음이 느껴진다. 많은 인생과 울고 웃으며 함께 살아낸 것 같다. 《당신이 더 귀하다》 속 고통을 마주하는 조금의 용기를 낸다면, 더 크게 웃고 더 진하게 울며 힘차게 살고 싶어진 한 뼘 더 자란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결코 고통과 아픔만 줄지은 이야기가 아님을, 그 사이사이에 눈부시게 새어나오는 빛과 따스함을 꼭 경험해보길 바란다.




*** 출판사 다산북스의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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