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박완서 산문집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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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부터 출판사 문학동네는 "박완서 산문집"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행운처럼 10년이 되는 해에 10번째 책인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이 출간됐다. 2005년 실천문학사에서 발간한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재편집하여 미출간 원고 5편을 수록하며, 박완서 여행 산문집의 완전판으로 세상에 나왔다.


박완서 선생님의 맏딸 호원숙 작가님께서 서문을 쓰셨다. "어머니가 어딘가에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쓰신 게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한다. 그런 것치고 어머니는 여행을 참 많이 다니셨기에." (4면)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 말씀이 괜히 반가웠다. 좋아하지 않는 여행을 박완서 선생님은 왜 그리 많이 다니셨을까?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남한산성과 강릉부터 중국 만주, 몽골, 백두산을 거쳐 바티칸, 에티오피아, 티베트 등 국내외 곳곳을 다닌 여행산문이다. 주로 1부에 미출간 원고 4편이 모여있는데, 그래서인지 국내를 다니며 소소한 일상을 여행기로 쓰신 글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의 깊은 통찰과 높은 시선에 감탄했던 행복한 독서였다.


늙는 거란, 엄두가 안 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거로구나. 요즘은 도통한 것처럼 그렇게 체념하고 있다.
- 14면


치욕도 파묻어두기보다는 드러내놓고 기억하고자 한 것은 확실히 성숙한 생각이고, 어느 만큼 잘살게 됐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아무도 그게 거기 있음에 관심이 없다면 그건 거기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17면


산엔 겨울만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봄도 가장 먼저 와 있다. 이미 얼음장을 녹여버리고 마음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의 어울림은 활기찬 봄의 소리였다.
- 18면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서 가장 사랑하는 글은 "내 나름으로 누리는 기쁨"이었다. 친구분과 번개 여행으로 비행기로 강릉을 간 이야기다.
"그날 하루만은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시간 붙들어 매놓은 것처럼 늑장을 부리자는 약속을 깨고 우리는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 될 수 있으면 잘하는 집 앞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했건만 기사가 내려준 집은 잡화상과 순두붓집을 겸한 볼품없는 구멍가게였다."
주인이 서울서 비행기 타고 이 순두부를 먹으러 왔느냐 물으며 "아짐씨들은 참말로 호강허네요" 기분 좋게 건네는 말에 선생님은 "호강"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신다. 편안함, 호화로움, 남이 부러워할 만한 일 등이 호강이라 생각할 때 그날의 여행은 온통 호강이었다.


남 나름으로 생각하던 걸 내 나름으로 생각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외의로 많다.
- 26면
호화판 호텔 뷔페는 남의 기준으로 보면 호강이겠지만 비싼 음식값이 부담 돼서 많이 먹어야지 벼르고, 손해를 덜 보려 시가로 비싼 음식을 고르고, 돈 생각해서 먹어두는 강박관념은 궁상의 극치지 결코 호강일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을 세워 주체적으로 살라는 의미를 이렇게나 편안하게 입에 붙는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하신 점이 정말 놀라웠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 바로 이것이다. 글을 읽는다기보다 말을 듣는 기분,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누워서 듣는 기분이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 술술 풀어놓는 구수한 입담에 활력이 살아 넘친다. 말 같은 글을 읽으며 어쩜 이렇게 자연스럽게 문장이 흘러 흘러나올까 신기하고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소설보다 산문에서 선생님의 문장력을 더 가깝게 피부로 느끼는 것 같다.


왜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이 사랑을 받을까 힌트도 얻었다. 일상의 자잘한 문제에서 가치를 건져 올리는 관찰력과 통찰력이 실로 놀라웠다. 선생님은 숨어서 볼 수 없는 삶의 보석을 기가 막히게 캐내, 장인의 솜씨로 다듬어 글로 내놓는 뛰어난 세공사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에 풍화되어 낡고 소멸해가는 것들을 연민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발견하는 그 시선을 따라가노라면 공감하지 않고는, 마음을 뺏기지 않고를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 무쇠를 저렇게 거울처럼 길들일 수 있는 아낙이 조선의 아낙 말고 어디 있을까, 가슴이 찡했다. 윗방 윗목엔 옷장이 놓여 있는 여러 쪽으로 나누어진 문짝마다 미남 미녀들의 천연색 사진으로 도배를 해놓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지금보다 십여 년은 더 젊었을 적의 유인촌, 이영하, 신성일, 신영일, 한혜숙, 김자옥, 선우은숙, 유지인, 홍세민의 모습을 확인했다. 우리나라에서 배우가 가장 인기 있었을 적 달력 사진인 듯했다. ...... 벽에 써붙여놓은 가갸거겨 줄로부터 하햐허혀 줄까지의 백사십 자의 한글이었다. .......
나는 그의 아내가 끓인 된장찌개로 밥 한 사발을 비우면서, 여기 이 사람보다 더 위대한 민족주의자가 있으면 나와보라지, 하고 외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84, 85면


이 시대의 어른으로 삶의 본질을 전해주는 메시지가 곳곳에 포진해있다. 그중 특히 감명받았던 문장, "꿈을 꿀 수 있는 한 세상은 아직도 살 만하다. 만일 그런 꿈도 없다면 무슨 맛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쓰고 남는 건 저축도 하고 최소한의 경제생활이나마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꿈을 꾸기 위해선 먼저 감정이 독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꿈처럼 독창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 31면)
감정이 독자적이어야 한다니, 꿈처럼 독창적인 것도 없다니...! 흔한 단어로 차원이 다른 의미를 담아내는 솜씨에 정신이 어질했다.


그 속에는 "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 담고 싶은 진심이 녹아있었다. 가감 없는 진솔한 자기고백들에 내 마음까지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의 그 큰 여행 가방 안에는 1980년대 내 나라의 궁핍과 나의 나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 내 가방을 열어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경멸했을 생각을 하며 오랫동안 심한 수치감으로 괴로워했다. 그 후에는 여행을 떠날 때 절대로 양말이나 속옷을 많이 가져가지 않고 그날그날 빨아서 입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 49면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으로 선생님의 기억과 경험을 삶의 맥락에 연결해 치열하게 현실을 탐색하고 모색하는 부단함을 배웠다. 시대의 슬픔과 상처를 삭히며 성숙으로 나아가고, 그 모든 것을 글로 쏟아내며 치유하는 선생님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음이 축복이라는 걸 알았다. 글로 삶을 비추어 읽는 이들이 발붙인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어른을 언제든 책으로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선생님은 세상과 사람을 잇도록 태어난 사절단이 아니셨을까.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글을 쓰신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글은 올바르게 살도록 받쳐주는 힘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은 곧 선생님의 됨됨이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이었나보다. 책보다는 박완서라는 한 사람으로 자꾸만 초점이 모아진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의 여행들은 편견에 갇혀 정체되지 않기 위해, 항상 유연하고 열려있기 위해 애쓴 선생님의 발걸음들이 아니었을까. 남다른 감각과 관점으로 낯선 곳에서 길어 올린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무감으로 쉬지 않고 기록하신 건 아닐까. 삶을 살듯 여행을 다녀오며 점점 확장된 사유와 통찰을 부지런히 남겨주신 선생님의 모든 시간에 감사드린다.


박완서의 여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글 속에서 세상과 사람을 구경하고 나를 새롭게 인식하며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즐거운 독서가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에 있다. 기나긴 설 연휴 동안 읽기에도 더없이 좋은 책, 모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출판사 문학동네의 도서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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