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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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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머리는 대나무 삼각대에 매달려 효수되었다. 머리가 잘린 사체들은 모래밭에 흩어졌다. 아침에 거지 아이들이 형장으로 몰려왔다. 거지 아이들이 토막 난 사체에 줄을 매서 마을로 끌고 나갔다. 목이 잘린 사체는 살았을 때 누구였던지 알 수 없었다. 거지 아이들은 민가의 대문에 사체를 들이밀며 밥을 구걸했다. 집 주인들이 질겁해서 밥을 내다주었다."

-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소설이다."
라고 저자 '김훈'은 책머리의 일러두기에서 가장 먼저 알리고 있다. 이 책은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인 소설인 것이다. 비록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조선시대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정약전을 비롯한 정약용, 정약현, 정약종 등 정씨 형제들과 중국인 주문모_周文謨 신부, 천주교도 황사영, <자산어보_玆山魚譜>의 공동저자 격인 장창대, 구베아_Alexandre de Gouvea 주교 등 실존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작가가 미리 일러두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에는 많은 허구의 이야기들이 얽혀 있어서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누구도 온전한 실존 인물이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조차 실제 역사 속 시대에서 앞뒤로 조금씩 '차용'해 왔다. 이쯤되면 대체역사, 아니 대출역사 소설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로 읽힌다. 허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역사소설로 읽힌다. 물론 소설을 쓰기위해 흑산도를 비롯한 사학죄인_邪學罪人(천주교인)들의 성지와 유배지를 답사하고 여러 연구자들이 이루어낸 학문적 서물_書物과 같은 각종 기록들을 찾아 읽으며 참고했다고는 하지만(작가는 이에 대해 '빚을 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한들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 시대'를 온전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책의 상당 부분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졌을, 아니 꾸며졌을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역사로 읽힌다. 독자와 작가 중 그 누구도 결코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지만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처럼 그 시대의 모습이 생생하게 읽히고 보인다. 한줄 한줄 글을 써 내려가기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녔을 발품과 이것저것 살펴보았을 손품이 고스란히 글품에 나타난다. 한마디로 실감난다. 글쟁이의 거짓말일지라도 그야말로 그럴 듯하다. 믿지 않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숯쟁이는 숯가마에 일이 없을 때는 따스한 가마 속에 메주를 띄웠다. 메주에 흙냄새와 불 냄새가 스며서 장맛이 깊었다. 숯가마 아궁이에서 사위면서 헐떡거리던 잉걸불과 마른 장작의 향기, 발정해서 싸질러 다니다가 며칠 만에 돌아와서 우물가에서 물을 먹던 수캐의 비린내, 청포묵을 쑤는 냄새, 햇볕 쪼이는 여름날의 마을 흙담 냄새가 형틀에 묶인 젊은 숯쟁이의 기억에 어른거렸다. 살점이 흩어진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의 냄새 속에서 기억 속의 마을의 냄새가 살아났다. 냄새가 어째서 물건처럼 기억되는 것인지, 지나간 냄새가 피 냄새를 밀어내며 콧구멍 속을 흘러들어왔다."......(본문 중에서 인용.)
최첨단 시설을 갖춘 4D 극장에서 영화관람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낡고 좁은 방안에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인데도 냄새가 난다. 메주 냄새... 흙냄새... 불 냄새... 피 냄새...(문득, 작가가 하드보일드_hard-boiled 소설을 쓰면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물론 방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상상력 넘치는 역사소설을 쓴다고해서 그 소설이 소설이기보다 역사로 읽힌다는 보장은 없다. 시대소설이 그냥 소설로 읽히느냐, 아니면 역사로 읽히느냐는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다. 책임이요, 능력이다. 그점에서 김훈은 본인의 몫을 다 했고 맡은 바 책임을 다 했으며 능력을 맘껏 발휘했다. 작가한테 '동인문학상'과 유명세를 안겨준 <칼의 노래>조차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의 입장에서 왜 "김훈", "김훈" 하는지를 <칼의 노래>를 읽지 않고도 이제는 알 수 있겠다. 더불어, 역사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까지도...

끝으로, 작품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이 책은 정씨 형제가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우리가 쉽게 알만한 '정약용_丁若鏞'이 아닌 그의 형 '정약전_丁若銓'이다. <자산어보_玆山魚譜>의 저자 정약전. 그런데 가만 읽다보면 정약전의 비중이 그리 큰 것도 아니다. 얼핏 보면 사학거흉으로 지목된 '황사영_黃嗣永'의 비중이 더 큰 듯도 하고 그런가하면 그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도 무시할 수 없다. 인물 하나하나가 주연급 조연으로, 그들이 떠받춰주는 것은 다름 아닌 천주교의 유입이 불러온 격렬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는, 또는 당황하는 조선시대이다. 주인공은 기울어가는/ 무너져가는/ 저 끝을 향해 달리는 후기 조선시대인 것이다. 흑산도로 유배간 정약전의 시선으로 바라본 검고 푸르다못해 붉고 하얗기까지한 머나먼 바다를 통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조선을 내다보며 이후에 도래하게될, 그 너머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작품 속 그림의 색상은 검은 빛이다. 온통 검은 빛 투성이. 이 책은 어둠을 그리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점 불빛도 없는 캄캄한 밤길을 걷는 기분이다. 검다. 까맣다. 막막할 정도로 어둡다. 답답할만큼 캄캄하다. 그야말로 검을 黑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검을 玆' 자산(또는 '검을 玄' 현산)이 아닌 '검을 黑' 흑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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