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1988년이다. 마가레트 대처가 자신의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고 있고, 다음 세기가 되어서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될 보수당의 집권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하고 있다. 내 막내딸은 일곱 살이며,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에이즈 환자를 수용소에 격리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폭동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전투 경찰은 자신들을 태운 말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복면을 쓰고 있으며 그들이 모는 밴에는 회전하는 카메라가 장착돼 있다. 정부는 모든 동성연애의 싹은 물론 그 추상적 개념마저도 잘라 내고 싶다는 욕구를 표명했으며, 이제 어떤 소수자가 불법의 대상이 될지는 추측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난 몇 년 안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냉정하고 비열한 이 곳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잘 자라, 영국. 잘 자라, 홈 서비스. 그리고 승리의 브이(V) 사인. 반갑다, <운명의 목소리>. 그리고 브이 포 벤데타.

_앨런 무어



<왓치맨_Watchmen>의 작가 '앨런 무어'가 쓰고, <슬레인 : 피의 가마솥_Sláine : Cauldron of Blood>, <나이트 레이븐_Night Raven>, <카드로 만든 집_House Of Cards>, <에일리언즈 : 유리 통로>, <이상한 전쟁 이야기>, <갱랜드>, <다크호스 프리젠트 86_Dark Horse>, <호러리스트_The Horrorist>, <헬블레이저 : 레어 컷츠_Hellblazer : Rare Cuts> 등 왠지 심상치않은 제목의 작품들을 주로 발표해 온 '데이비드 로이드'가 그린 디스토피아 그래픽 노블의 기념비적인 작품 <브이 포 벤데타>!

1983년 <워리어_Warrior> 매거진에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일찌기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예언했던 <1984>의 도래를 그리고 있으니 작품 속 전체주의 사회로 묘사되는 가상국가는 근미래(1997년)의 영국으로 시대적 배경을 간추려보자면, 이미 1980년대의 불경기를 지나 3차대전이 발발하고 원자폭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아프리카와 유럽이 지구상에서 소멸된 전 세계적 혼란의 시기에 무정부상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사방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그 와중에 파시스트 단체들과 우익세력들이 주축이 된 '노스파이어_Norsefire'가 정권을 잡은 뒤 흑인과 파키스탄인들, 그리고 동성애자를 비롯한 백인 급진주의자들을 불법체포, 강제구금하는 등 사회적 변혁을 거쳐 통제와 강압으로 '무장'된 경찰국가에서 '빅브라더'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인 '리더_The Leader'와 그의 통치 시스템 '운명_Voice of Fate'이 눈, 귀, 코, 손가락, 목소리, 입 등등의 하부기관들을 이용해 국민들을 감시하며 국가를 지배한다는 설정아래, 정부가 관리하는 수용소에 갇혀 모종의 실험대상으로 정신적 변화를 겪은 사나이가 주인공으로 등장, 수용소를 탈출한 '그'가 벌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복수극에서 시작된 한 인간의 굴하지 않는 '신념'이 어떻게 전 사회적인 혁명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지 그리고 확고한 '의지'가 어떻게 발휘되며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한발두발세걸음네걸음다섯뜀여섯뜀 단계적으로/체계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정권 뒤집기 참 쉽...)
"독재 사회는 피겨스케이팅과 같아. 복잡하고, 기계적으로 정확하며, 무엇보다 불안정하지. 문명의 부서지기 쉬운 껍질 밑에는 차가운 혼돈이 휘몰아치고 있어. 그리고 거기엔 위험하리만치 빙판이 얇은 곳들이 있어...
권력이 처음 혼돈을 발견하게 되면 기존의 거짓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사악한 방법을 쓰기 시작하지. 하지만 그 질서에는 정의란 없어. 사랑이나 자유도 없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대혼란에 빠지는 것을 얼마 늦추지 못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는 내용만으로도 모자라 그림체 역시 그 못지않게 거칠고 어둡고 심지어 따분하기까지 함에도(인물이든 사물이든 외곽선을 마저 다 그리지 않는 독특한 생략법은 인상적!) 몇 장 넘기다보면 어느 순간 그림체에 익숙해지며 마침내 작품속으로 몰입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글을 쓴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와 함께 문득 깨달은 또 하나의 대단한 점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놀라운 점이며 독특한 점이고 위대한 점인데 바로 '효과음'이 없다는 것...
TV로 외화를 볼 때 간혹(어디까지나 '어쩌다가') 볼륨을 음소거 상태로 해놓고 보는 경우가 있는데 볼륨을 최대치로 해봤자 어차피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는 데다가 자막이 있으니까 소리가 안 들린다한들 내용을 이해하는데야 별반 큰 문제가 없을뿐더러 때때로 '남다른 재미'를 주고있으니 조용히 외화를 보던 도중 '이쯤에서 이러이러한, 저쯤에서 저러저러한 음향이 들리겠지?' 하는 것을 홀로 상상하는 경우로 상황에 맞춰 적절한 음향효과를 스스로 내다보면 나름 재미가 있더라는...
그런데 <브이 포 벤데타>는 영상매체가 아닌 인쇄매체임에도 '그런 재미'를 주고 있다.(뭐 모든 독자가 '이런 방식'을 재미있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며 불에 타고, 여기 고함소리, 저기 비명소리는 물론 폭죽소리, 폭탄소리, 신음소리, 총소리, 문부수는소리, 구타소리, 불꽃타오르는소리... 암튼, 그림에서 보여지는 모든 소리 효과를 일절 배제한채 오직 독자가 알아서 능력껏 판단/연출/반응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는데, 가령 떼지어 모여 소리지르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눈으로 볼지언정' 효과음을 삭제함으로써 실제로는 그들이 환호하고 있는 것인지,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 '귀로 듣지 않으면 다 똑같다'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세상 돌아가는 꼴이 훤히 다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국민들 귀만 막아서 안 들리게 하면 마치 다른 세상인줄 알겠지?하는 착각 속에 빠진 위정자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특히나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그러나, 무어와 로이드가 그 모든 '소리'를 일절 차단하기 위해 그토록이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부가, 사회가, 체제가 무너지는 소리는 너무나도 크게 들린다. "쿠.와.아.아.아.앙!!!!!!! 와.그.르.르.르르르르...")
"소음은 그 앞에 오는 고요함과 연관돼 있어. 그 고요함이 절대적일수록 뇌성은 더욱 충격적으로 들리지. 우리의 주인은 민중의 목소리를 몇 세대동안이나 듣지 못했어. 이비...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지."


끝으로, <브이 포 벤데타>가 억압된 사회주의 국가를 배경으로 박해받는 민중의 궐기를 그렸다는 점 때문인지 여기서는 '이거 딱 우리 얘기다'하는가 하면 저기서는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마라'하며 상반된 의견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현실과의 상관성이 어떻든 의미심장한데다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구석이 있는 작품으로, 세상 그 어떤 민주국가일지라도 비민주적으로 억압되고 통제되는 부분이 어딘가는 반드시 있기에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 역시 '이건 우리랑 비슷하다'라고 여길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역시 '완전 상관없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우리네 현실과 똑같다기보다는 우리는 저렇게 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정치하는 국민의 머슴'들한테도 일독을 권함.(국가에서 판금조치를 취하기는커녕 '국방부 불온서적' 목록에조차 올라있지 않은 것을 보니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작품속 상황은 아닌듯해 참으로 다행...?)
"브이, 이 모든 폭동과 소란들... 이것이 무법이란 건가요? 이게 '마음대로 하는 나라'인가요?"
"아니, 이건 그냥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라 나라'야. 무법이란 '무질서'가 아니라 '리더'가 없다는 뜻이야. 무법과 함께 질서의 시대가 온다. 진실한 질서는 자발적인 질서를 말해. 광기과 모순의 혼돈 주기가 끝나고 나면 질서의 시대가 시작될 거야. 이것은 무법이 아니야, 이비. 혼돈일 뿐."








덧,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렵지만 행동하는 것'이 용기다.

"그래. 왜냐고 묻는다면 비록 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래. 왜냐고 묻는다면 비록 그들은 날 죽이겠지만 만약 하지 않는다면 내 목숨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야.
그래. 왜냐고 묻는다면 역사는 내 다리를 움직이고 있고, 아무것도 날 멈출 수 없기 때문이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09-11-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보다도 상당히 늦게나오지만 이책도 국내에서 번역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