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희망의 존재가 올바름으로

    

희망 아래 절망하는 사람들

희망에는 밝음이 있다. 희망에는 빛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만큼 긍정적인 힘을 줄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품은 인간이 얼마만큼 어두워질 수 있는지, 얼마만큼 악해질 수 있는지 베어타운은 보여준다. 인간의 선악을 두고서 여러 설명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선했다던가, 태어날 때부터 악했다던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로 태어났다던가 하는.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인간에게 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베어타운은 하키라는 희망 아래 상처 받고 절망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베어타운, 그리고 하키

베어타운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조그만 타운이다. 점점 무너져가는 타운에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키이다. 베어타운 아이스 하키단이 전국 리그에서 우승만 하게 된다면, 그래서 아카데미가 들어서게 된다면 베어타운은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렇기에 하키는 단지 어린 소년들의 스포츠가 아니다. 소년들의 자존심이자 꿈이며, 타운 사람들의 명예이자 미래다. 그래서 늘 베어타운 아이스 하키단의 경기가 열릴 때면 좌석을 늘 매진이었고, 뛰어난 실력을 가진 소년들은 타운의 자랑으로 칭송받는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어요. 청소년팀 선수들에게 너무 엄청난 부담을 안기는 건 아닐까. 알고 보면 걔들도 아직…… 어린애들인데 말이죠.” 

하키 실력은 곧 소년들, 아니 모든 청소년들 사이에서 권력과 지위였다. 어른들도 하키 실력이 출중한 소년에게 암묵적인 권력과 지위를 주었다. 베어타운이 살아나 돈을 벌 수 있게 된다면 뭐든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어른들로부터 자라난 아이들은 하키가 다른 무엇보다도 강력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어타운 하키단의 천재 하키 선수 케빈이 구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을 한 그 순간부터 소년들은 자신들이 알아왔던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약자들로부터 피어나는 올바름

베어타운을 읽는 도중에는 깨닫지 못하지만, 내용을 돌이켜볼 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베어타운에는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어타운은 묘사하고자 하는 중심인물이 바뀌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한 명의 중심인물을 가지고 주변인물을 설명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베어타운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한 번씩 중심인물로서 다룬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도중에는 사회적 약자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사회적 약자의 면모를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베어타운의 약자들은 저마다 하키가 아닌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하키를 포기하고 악에 맞설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아나에게는 친구라는 희망이, 아맛에게는 엄마라는 희망이, 벤이에게는 사랑이라는 희망이 존재한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베어타운의 모든 약자들에게는 저마다의 희망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모두가 케빈을 감싸려고 할 때 이들은 올바름을 향해 나아간다. 베어타운을 읽는 독자들은 때로는 희망이 인간을 악에 물들게 하지만, 때로는 희망이 인간을 악으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것을 이들을 통해 알게 된다.

 


이런 때 웃게 만드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절망 아래 희망을 찾는 사람들

케빈이 전국 리그 결승을 앞두고 경찰에 체포되면서 타운 사람들과 하키단 선수들은 충격에 빠진다. 이것이 모두 자신들을 망치려하는 음모라고 생각하고 마야를 향해, 마야의 가족을 향해 비난한다. 아이스 하키 선수단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마야의 가족들은 타운 사람들에게 가해자가 되어있었다.

 


마야가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보호하기 위해 케빈은 진실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날 아침 창가에 서 있었을 때부터 이 마을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마을과 이 날의 실상을 보여주는 끔찍한 단면이다. 

하지만 마야와 마야의 가족들은 그러한 부당함에 맞섰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아는, 올바름을 위해 하키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함께했다. 결국 케빈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악에 맞섰던 사람들은 그에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아간다. 베어타운은 하키라는 희망 아래 상처 받고 절망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절망 아래 새로운 희망을 찾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벚나무에서는 항상 벚나무 냄새가 풍긴다. 하키 타운에서는 늘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인종차별, 은밀함과 드러냄 사이


2016 맨부커상 수상작
 소설가 한강님의 수상으로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맨부커상은 영국연방 국가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 가운데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주는 문학상으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힌다. 그렇기 때문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소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로 이 소설 『배반』은 2016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인종차별이라는 소재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나가면서 신랄한 풍자를 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종 분리 정책
 주인공은 지도상에서 사라진 도시이자 자신의 고향인 디킨스 시에서 인종 분리 정책을 실시하다가 대법원 상고심에 소환된다. 인종차별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미국에서 어째서 흑인인 주인공은 인종 분리 정책을 실시하려고 하였을까? 아마 인종차별을 철폐하려는 시도들이 완벽하지 않은 법률과 완벽하지 않은 문화와 완벽하지 않은 인식으로 인해 오히려 혼란을 일으켰다고 주인공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라진 자신의 고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안정이 필요했고, 안정을 위해서는 인종 분리 정책의 부활이 주인공이 생각한 답이었다.

그는 대체 어떻게 오늘날 이 시대에 흑인이 노예를 소유함으로써 수정 헌법 13조를 어길 수 있는지 따지고 있다. 어떻게 내가 대놓고 수정 헌법 14조를 무시하면서 인종 분리가 사람들은 통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 대체 언제부터 노예 제도와 분리 정책이 사람을 해쳤다고 이러는 건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까짓것 뭐가 대수라고.

 
인종 차별
  사실 예전 같았으면 인종 차별이라는 것이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를 단일민족이라 지칭하는 만큼 다른 인종을 만날 기회가 적었을 테니까.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많은 인종들이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어서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 인종 차별적 행동에 피해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자주 들려온다. 겉으로는 평등, 이해를 외치면서 사실은 그것이 내면화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요즘 사회의 큰 문제점이 아닐까? 인종차별은 우월하고 열등하고를 가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차별하는 이의 입장에서 차별한다는 것 안에는 그들을 소수거나 약자인 즉, 열등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종 때문에 직접적인 차별을 당해 본 것은 평생 단 한 번이었다. 어느 날 나는 어리석게도 아버지에게 미국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말했다. 평등한 기회가 있지만, 우리 흑인들은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싫어서 발로 걷어차 버린다고 했다 ··· 백인 남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을 뱉으면서 서로에게 물었다. 세 명 중 가장 말이 없던 사람이 일어나더니 <나스카에서 니거를 퇴출하라>라고 적힌 티셔츠를 내보였다.

 
현실 풍자
  『배반』은 인종차별의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재현해 낸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것으로 풍자를 하고 있다.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읽힐 수도 있으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 어떤 것보다 신랄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과거와 달리 현재의 세계는 평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 그 과정이 순탄치가 않다. 법적인 제도 즉, 문자로만 평등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법적인 제도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인종차별에 대해 자신들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해 버린다. 법의 제정이 사람들의 사소한 인종차별을 덮어주는 가림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반』은 그런 점들을 캐치하여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보호막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둠에서 어둠으로, 그 속에서 빛을

『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저/열린책들/2017]

실종된 헝가리인

 주인공은 실종됐다가 56년 만에 돌아온 헝가리인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헝가리인의 자취를 따라 여행을 떠난다. 자취를 따라라기 보다는 자취를 찾아서가 더 옳은 표현인 것 같기도 하다. 헝가리인이 입원해 있었다던 정신병원을 찾기 위해 러시아의 코텔니치를 방문한 주인공을 포함한 제작팀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코텔니치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소설의 시작은 이 헝가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헝가리인이 가지고 있을 의미에 대해 추측하고 예상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되어 나가는 내내 헝가리인의 등장은 크게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고, 그때서야 독자는 일종의 맥거핀 효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게 쉬운 소설이 아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또 그 헝가리인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헝가리인이 아니었다면 주인공이 외조부의 망령을 쫓아내려 다시 코텔니치를 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인의 이야기가 내게 그렇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이것이 이 어머니의 꿈에 실체를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조부의 망령

 주인공에게는 한 번도 보지못한, 어느 날 실종된 외조부가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외조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머니와 외삼촌이 해주는 이야기, 그리고 외조부가 썼다던 편지들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외조부를 알면 알수록 어머니와 외삼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까지 외조부의 망령이, 저주가 손을 뻗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주인공은 실종된 외조부의 삶을, 죽음을 알게 된다면 외조부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실종됐던 헝가리인이 있었다던 코텔니치로 다시 향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코텔니치라는 곳에서 돌아왔고, 나는 그곳에 갔으며, 또 한 번 가야 할 거라고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코텔니치는 사라진 누군가가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외조부의 망령이라고 지칭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를 불안에 떨게 하는 그 무언가. 주인공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모는 것만 같은 그 무언가.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있는 어떤 불안감이 외조부로부터 시작되었고, 외조부의 실종과 함께 해소할 수 없는 불안으로 남겨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조부의 죽음을, 비석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불안을 없앨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코텔니치로의 여행은 주인공 자신을 위한 여행길이며 자신의 삶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주인공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를 소설로 남김으로써 어머니도 외조부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불안한 사랑

 처음 코텔니치로 떠나는 기차 안에서 주인공은 소피와 섹스하는 꿈을 꾼다. 그만큼 주인공은 소피에게 빠져 있었다. 자신이 이제껏 만난 여자들 중에서 소피만한 여자가 없었으며 비록 자신과는 다른 계층의 사람이라고는 해도, 자신이 꿈꾸던 무언가,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외조부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하는 주인공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에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조차도 온전히 믿고 사랑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소피와의 다툼을 반복한다.

다시 코텔니치로 떠나면서 주인공은 외조부의 망령을 내몰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겠다는 기대감을 가진다. 왠지 새로운 자신이 될 것만 같다는 기대감에,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 확신하며 주인공은 소피와의 관계도 변화시키기 위해 르 몽드에 소피를 위한 글을 싣게 된다. 왠지 새로운 자신이 될 것만 같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소피와의 관계 개선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과 소피와의 관계를 더 나락으로 내몰게 된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소설은 어둠에서 시작해서 어둠으로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외조부의 망령과, 찾지 못한 정체감, 소피와의 불완전한 관계의 탈피를 위해 주인공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남아있던 것은 없애지 못한 외조부의 망령과, 찾지 못한 자신의 뿌리,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소피와의 관계였다.

난 내 삶 가운데의 2년과 코텔니치와 내 할아버지와 러시아어와 소피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지만 내 속을 갉아먹고 있는 무언가를 포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 정체를 모르고, 그것은 여전히 내 속을 갉아먹고 있다.

 하지만 어둠에서 어둠으로의 수평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둠으로 가는 과정에서도 분명 빛은 있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같은 어둠이되 다른 어둠이 되었다. 비록 외조부의 망령을 쫓아내지 못했지만 이유모를 공포로서만 다가오지 않게 되었고, 자신을 정확히 명명할 수는 없어도 좀 더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게 되고 이로 인해 엄마를 구제해 줄 기회가 되었다. 소피와의 관계는 끝이 났지만, 비극적기 보다는 헤어짐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여행 전 후에 얻고자 하는 것들은 얻지 못했지만 다른 것들을 얻었고, 주인공에게는 원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방향의 변화이든 이는 주인공에게 새롭게 삶을 살아가고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삶을 전환시킬 터닝포인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아몬드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몬드』 [손원평 저/창비/2017]

아몬드

엄마, 할머니와 함께 사는 윤재는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고, 뇌 변연계와 전두엽 사이의 접촉이 원활하지 못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 표현 불능증 환자이다. 그런 윤재에게 엄마는 감정을 암기시킨다. 수십, 수백가지의 상황을 만들어 각 상황마다 어떤 감정의 표현을 해야하는지, 느낄 수 없는 윤재에게 학습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일어나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고, 할머니는 돌아가시게 되었다. 윤재의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윤재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 살아가던 윤재는 곤이와 도라를 만나게 된다. 곤이와 도라를 만난 후 윤재에게는 점점 변화가 생긴다.

진단과 가능성

 감정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직접 느끼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일종의 경험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할 수 있기를 원하고 확실히 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불안을 만든다. 한 번 정의를 내리고 나면, 그 정의를 건드리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정의라는 것은 늘 불완전하다는 것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완전하지 않은 점들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또 불안해지게 된다. 인간은 늘 모든 것을 지배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책 속의 의사들 또한 윤재의 상태를 확실히 정의할 수 있기를 원했다. 감정이라는 것이 정말 아몬드처럼 생겼다는 편도체에서 생기는 지도 사실은 확실히 할 수 없으면서 윤재를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진단해 버렸다. 이해보다는 불안의 해소가 더 중요했기에 윤재는 병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확실한 병명이 진단되었다는 것은 병이 아닐 가능성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감정이라는 감성적인 부분을 이성적으로 설명을 하려 시도한 순간부터 부정적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던 거나 다름없다.

감정 표현 불능증 (Alexithymia)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것일까 하는 생각에 윤재를 안타까워하게 된다. 정작 윤재 자신은 괴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라 괴롭지 않을텐데. 윤재의 병을 아는 사람들은 많아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안다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고, 동정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도 다르다. 사고를 겪은 후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윤재를 보는 주변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윤재 탓이라는 것 마냥 마음만 먹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는 것 마냥 윤재를 잘못된 아이, 좋지 않은 아이로 보았다.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윤재를 보며, 포용이 아닌 배척의 행동을 보였다.

 인간은 단호한 존재이다. 나와 남으로 이루어진 이분법적인 생각 속에서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하며 그 모습을 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한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사실 감정 표현 불능증이 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들을 느끼며 상처받고 살아가는 것 보다 누구에게도 감정을 주지 않고 받지도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 윤재에게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느끼면서도 거짓된 감정으로 포장하는 사람들도 어떤 면에서는 감정 표현 불능증 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감정이란 것을 주고받지 않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편할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감정의 교류를 실천하려 하는 것은 감정을 주고받음으로써 받는 상처 뒤에 숨어 있는 작은 관심과 사랑이 다른 것들을 덮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책을 읽으며, 윤재가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윤재가 자신에 향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변화

 

 윤재를 변화시킨 것은 윤재 혼자만의 힘도, 윤재 주변의 사람들만의 힘도 아니다. 감정이란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서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윤재가 아직 감정이란 것을 알지 못할 때 엄마도, 할머니도, 심박사도, 곤이도, 도라도 있는 그대로의 윤재를 받아들이며 감정이란 것은 느끼면서 알아가게 되는 것임을 윤재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는 병으로 한계가 정해져 버린 윤재에게, 감정을 학습했다고 생각하는 윤재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또,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하려면, 말이 아니라 직접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72월에 내 삶으로 들어온 책

『동급생 (Reunion) [프레드 울만 저/황보석 역/열린책들/2017]

동급생

 유대인인 한스 슈바르츠는 어느 날 전학 온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를 보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우정을 나눌 상대라는 것을 확신한다. 한스는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를 이제껏 기다려왔으며 그 친구가 바로 콘라딘임을 확신하여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언젠가 콘라딘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한스는 아버지가 격식을 갖춰 귀족 대하듯이 자신의 친구를 대하는 것에 충격을 받지만, 콘라딘의 배려로 곧 괜찮아진다. 한스는 콘라딘이 자신을 부모님에게 소개시키는 것을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화를 내지만, 이내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 때문인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우정만 펼쳐질 것 같은 한스의 눈 앞에 점점 변해가는 현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 자신은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더 이상 한스가 독일에서 살기가 힘들어질 것이라 생각한 부모님은 한스를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보내게 된다. 한스는 떠나기 전, 콘라딘에게서 편지를 받지만 한스는 편지를 읽으면서도 자신의 우정이 끝났음을 생각한다. 훗날 어른이 된 한스는 전쟁으로 인해 죽은 동문들의 이름들을 보게 된다. 콘라딘의 이름을 피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다시 책을 열어 콘라딘의 이름을 찾아 보게 된다.

 

이상과 현실

 한스는 이상적인 우정을 꿈꾸는 소년이다. 자신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와의 우정. 비록 많은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한스에게 있어서 우정이란 현실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실 소설 중간중간, 그리고 뒤로 갈수록 곳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지만, 한스가 화자인 소설 속에서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유대인이나, 나치, 히틀러 같은 것이 아니라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다. 한스가 콘라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과 생각들, 두 소년의 우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가벼운 여러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소설이 홀로코스트 징조를 가지고 있음을 저도 모르게 잊게 된다.

 두 소년과 별개로 소설 속 현실들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심해지는 나치즘, 어른 사이에서의 정치 감정이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스며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소설의 중심축을 잡고 있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러한 배경들을 암울하게만 보이도록 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히틀러와 나치즘의 등장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한스에게는 콘라딘이 자신을 부모님에게 소개시키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였을 뿐이다. 작가 또한,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의미를 가지되 무겁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은 한스가 살고 있는 동네를 묘사하는 문장들이다. 한스와 콘라딘이 지나다니는 거리 하나하나, 풍경 하나하나 여러 미사어구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상상하면서 읽다 보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부서지고, 무너진 거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웃으며 걷는 봄날 같은 거리가 펼쳐져 있다.

 

현실과 이상

 독일인들의 유대인 탄압이 심해질 거라 생각한 한스의 부모님은 한스를 미국의 친척집으로 보내게 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현실에 부딪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두 소년의 우정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은 부서지고 마는 부분에서야 비로소 현실의 암울함을 독자는 느끼게 된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 동안 독자는 그러한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고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만을 응원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결국, 한스와 콘라딘이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모습은 잊으려 했던 어두운 현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소년 시절에만 간직할 수 있는 이상이었을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그 미성숙함에서 현실을 알게 되어 이상은 그저 추억 속에 남겨진 흔적 같은 것이었을까.

 

 현실과 상관 없이 행복하게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가 점점 곤두박질 치는 것을 보면서 결국, 헛된 이상이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작가는 소설 마지막 한 줄로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부분은 마지막 몇 장도, 마지막 몇 줄도 아닌 마지막 단, 한 줄이다. 마지막 그 한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독자는 현실을 이겨낸 이상을 보게 된다. 소설의 제일 첫 줄에 쓰여져 있는 그는 1932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의 이유를 소설의 맨 마지막 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정

 한스는 늘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를 꿈꿔오며 콘라딘과 친구가 되기를 원했지만, 미국으로 떠나면서도 한스는 콘라딘이 자신을 진정한 친구라 생각하는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그럴 것이 한스는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스가 그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망쳐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그 한 줄에서 한스는 콘라딘이 자신을 진심으로 친구로서 생각했다는 것과 제가 갖고 있던 친구에 대한 이상을 콘라딘이 실현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콘라딘에게 한스는.

 

 작은 걸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을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뤘다. 하지만 진실성의 가벼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우정을 무겁게 어두운 현실을 가볍게 쓴 소설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잊고 살았던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졌다. 왠지 이 소설을 읽은 오늘은 친구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본받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