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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9년 1월
평점 :
번역과 어린왕자
[Le Petit Prince <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생택쥐페리·이정서 저/새움출판사/2019]
「어린왕자」로 본 번역의 세계
실제 「어린왕자」에 비해 몇 배나 두꺼운 이 책은 단순히 어린왕자 소설 내용만을 담고 있지 않다. 왼쪽에는 불어 원문과 오른쪽에는 일대일로 대응을 한 번역문, 각 장이 끝나고 난 뒤에는 번역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작가가 생각하는 이전 번역들의 문제점이 실려 있다. 그래서 저자가 생택쥐페리가 아닌 생택쥐페리와 이정서인 것이다.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있는 이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볼 만 했다. 단지 소설만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부분만을 읽어도 좋고, 불어 번역뿐만 아니라 번역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부를 읽어도 좋다. 사실 번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도 뒷부분은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기존의 번역자들을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읽기가 조금 불편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 어떤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지, 왜 지적을 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읽어 나가는 것이 좋다.
어린왕자
이십 여 년을 살면서 읽은 책 중에 「어린왕자」처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른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어린왕자를 읽을 때의 상황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달라지다고 생각한다. 그 때의 나이, 기분, 상황에 따라 내가 중점을 두고 읽게 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요즘은 곧 사회인으로서 나아가기 위해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이다. 어떤 날은 긍정적인 마음이 차오르면서 밝은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두려워지면서 어려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어른과 아이에 대한 미묘한 정의와 묘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면서 읽게 된 것 같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어린왕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때론 어른과 아이는 마주할 수 없는 평행선과 같다. 어른이 하는 고민의 무거움을 아이는 이해할 수 없고 아이가 하는 고민의 무거움을 어른은 이해할 수 없다. ‘나’가 비행기 엔진을 고치는 일이 어린왕자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어린왕자에게는 양을 갖는 일이 비행기 엔진을 고치는 일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른에게는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존재한다. 아이에게는 중요한 일 하나와 또 하나가 더 있는 것이다. 어른인 내가 아이에게 배워야 하는 점이지 않나 싶다. 사소한 내 일도 다른 사람의 일처럼 중요하다는 아이의 생각은 누군가는 아이의 이기적인 면이라고 말한다. 그 이기적인 면은 곧 다시 말해 타인의 일을 내 일과 동등하게 보는 공감적인 면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아이라는 존재는 늘 좀 더 조리 있게 말을 할 수 있고, 권력을 갖고 있는 어른의 입장에서 묘사되어 왔다. 그래서 아이의 공감적인 면도 이기적인 면으로 정의되어 버리고 그것은 곧 어른에 비해 현명하지 못하다는 낙인이 된다. 아이를 동등한 존재로서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시작이 아닐까. 아이를 동등한 존재로서 이해하게 된다면 아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
한 때 번역가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불어 쪽이 아니라 일어 쪽이었지만 그래도 한 때는 번역가를 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없어져 갔지만, 주된 이유는 한계였다. 단순히 내가 가지고 있는 일어 실력만으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번역은 단순히 독해가 아니다. 소설은 그 나라의 언어문화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등 모든 문화가 총체적으로 집합되어 있는 문화적 산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새로운 언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언어실력을 기본으로 둔 상태에서 높은 문화적인 이해와 함께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번역의 오류 또한 그러한 카테고리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문법적 오류와 단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같은 언어적인 부분, 또 하나는 언어적인 부분에 있어 언어문화-존대어, 친밀감을 뜻하는 하대 등 우리나라의 언어문화와 차이점 이해 등-, 마지막 하나는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작가의 의도 파악 부족이다. 물론, 번역에 대한 전문가이기 때문에 작품의 큰 오류보다는 독자가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함에 있어 방향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주제가 번역가에 의해 크게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소한 부분, 예를 들자면 어린왕자의 버릇없는 어린아이 같은 이미지, 어린왕자가 돌보던 꽃의 까칠한 이미지와 같이 사소한 부분에서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을 쓸 때는 쓰기 전부터 깊은 고민을 통해 작품을 구성한다.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것이라고 작가가 어떤 의미를 담기 위한 이미지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작품에 보이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더욱 번역가의 시각에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된 상태에서 작가의 의도에서 번역을 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이 문장부호 하나도 바꾸지 않는 등 직역에 근거한 번역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번역가가 어떠한 이유로 문장 구조를 바꾼다던가 문장을 생략 한다던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번역인지 작품에 대한 번역가의 재해석인지는 고민해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