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 영원한 내부고발자의 고백
신평 지음 / 새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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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내가 변화된 오늘의 나를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손평 저/새움출판사]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는 저자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경북대 로스쿨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저자가 총장과 동료 교수의 비리를 고발하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 사건으로 전개되어 간다. 총장의 비리를 밝히고, 동료 교수의 성매매 의혹을 제기하면서 저자는 모두의 적, 공적이 된다. 이미 로스쿨에 대한 쓴 소리를 내뱉어왔던 그였기에 로스쿨 교수들로부터는 당연히 아무런 지지도 받지 못했고, 법조계에서도 이미 퇴출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저자는 홀로 싸움을 이어갔다. 물론 저자의 일기 형식이니만큼 주관적으로 쓰여져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사건을 바라볼 때 각자의 관점이 다르듯이 저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전적으로 저자의 말을 믿고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보이는 우리 법조계의 어두운 면면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수 속에서 소리 내기

   저자가 법조계로부터 배척 당하고고 로스쿨에서조차 외면 받은 궁극적인 이유는 다수와는 다른 소수의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다수를 거스르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따라온다. 그것이 다수를 비난하는 것에는 더욱 더. 저자는 법조계의 비리들을 고발하고 법조계의 변화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는 곧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의 사람들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그 무리로부터 배척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모두가 관습이라고 생각한 판사 재임용에서 떨어진 것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힘든 시간을 겪은 후에 저자는 어렵게 로스쿨 교수가 된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옳지 못하다 생각한 것을 고발한다. 어느 면에서 저자는 미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법조인, 아니 모든 인간들이 가져야 할 불의에 맞서는 용기, 옳음을 추구하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소수의 사람들은 다수에게 이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은 포기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소수가 모여 다수가 되는 것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싶다.

 

과거와 더 나은 오늘

   그래도 우리 사회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정농단 사건 때의 그 노란 촛불 물결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를 계기로 사람들은 더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수가 함께가 되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요즘 거의 매일 같이 좋지 않은 뉴스들이 나온다. 그러한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들은 반응한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과거의 혼자서 생각하던 생각들을 말로서 내뱉고, 보이는 면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면을 본다. 과거의 우리들로 인해 현재의 우리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다. 저자가 홀로 외쳤던 것들을 지금은 조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변화해 간다. 십 년 뒤의 오늘은 지금으로 인해 더 나은 날이 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이제는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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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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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속의 애정

[사양/다자이 오사무 저/장현주 역/새움]

 

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적인 소설이라고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인간실격뿐이었다. 인간실격과 더불어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인 사양을 읽기 전 마음의 준비가 사실은 필요했다. 5번의 자살시도로 세상을 떠난 다자이 오사무. 늘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살다간 인물로 회자되는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이 사소설(私小說)로 언급되듯 자신의 소설 속에 자신의 삶을 깊게 투영하였는데 사양 또한 그러리라 생각되었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 중 우울하지 않고, 기쁨에 파묻혀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리. 사소설은 그래서 더 읽는 데에 많은 감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그런 점이 그 시절 일본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어두움 즉, 자신의 어두움을 쉽게 드러내지 못할 때 다자이 오사무는 드러내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특별한 존재였다.

우리의 존재 근거를, 살아갈 이유를, 다자이의 문학에 걸었다.

_오쿠노 다케오(문학평론가)

 

사양;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 감

  사양이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생소하지 않은 단어 같았다. 내가 아는 그 사양일까 하는 생각에 검색을 해 보니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 감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았다. 책 속의 일본 최후의 귀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패배로 막을 내리고 세상을 급속도로 변해갔다. 더 이상 작위는 의미가 없었다.

  일본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타협심 사이에서 어느 한 곳으로의 정착을 하지 못한 채 주인공과 어머니는 부유하듯 흘러갔다. 자존심이었는지 귀족으로서의 긍지였는지 또 다른 무엇이었는지 사실은 알지 못한다. 소설 속 누구나가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고 행동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며, 우아한 귀족으로 보는 가즈코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가즈코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으로 어머니를 보살피려 애쓴다. 어머니에 대한 가즈코의 순수한 사랑을 보면 볼수록 점점 의문이 들었다. 가즈코 자체가 변해가는 세상에 과거를 놓지 못하고 변해가는 세상과 연결하는 억지 봉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우아함, 고결함, 아름다운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즈코는 현실에 타협해야만 했다.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귀족 어머니를 위해서? 하지만 가즈코의 어머니 또한 가즈코를 위해 자신의 일부분을 포기하려 했음을 이즈로의 이사를 통해 알았다.

 

가즈코가 있어서, 가즈코가 있어 줘서, 나는 이즈에 가는 거야. 가즈코가 있어 줘서

 

애정

  마약과 술에 중독된 남동생이 살아 돌아오고 어머니가 병에 걸려 쇠약해지면서 점점 가족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가즈코의 삶의 목적은 여태껏 어머니였다. 어머니 한 사람을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맹목적이게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어머니를 사랑해왔다.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이란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가즈코는 한 번 보았던 남자를 떠올린다. 부인과 자식이 있는 그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즈코는 자신이 직접 남자를 찾아가기로 하고 이즈를 떠난다. 가즈코는 남자를 만나고 하룻밤을 보내 결국 자신이 원하던 아이를 갖게 된다. 하지만 가즈코가 남자를 만나던 그 밤 동생 이즈미는 목을 매단다.

  이즈미는 변해버린 세상에 녹아드려 하지만 녹아들지 못했다. 귀족도, 민중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이즈미는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이즈미의 유서 속에서 가즈코는 이즈미가 사랑했던, 사랑했지만 누군가의 아내였던 여자를 알게 된다.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도, 적응하려 했던 사람도. 그들에게는 애정이라는 것이 삶의 목적이자 방향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했던, 언젠가 떠나갈 사랑하는 남자를 대신할 그의 아이를 원했던 가즈코도, 귀족이라는 둘레에서 벗어나 민중이 되고자 했던, 누군가를 사랑했던 이즈미도, 이 둘을 사랑했던 어머니도, 어머니를 사랑했던 이 둘도. 사실 사양은 몰락을 말하고자 했던 동시에 몰락 속에서 저마다 지니고 있던 애정이 있었음을 말해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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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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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애증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저/장현주 역/새움출판사]

 

순수

  주인공 요조는 부잣집 막내아들로서 남부럽지 않게 자라왔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은 생각, 자신의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그 불안감과 혼자만 다르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이는 순수함으로 인한 무지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아닌 타인의 본질과 본성을 알기 힘든 존재이며 내가 타인을 속이듯이 타인도 나를 속일 수 있다. 요조는 그런 인간의 이기심과 모호성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이 무지 자체가 되어버리고, 공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이 보통의 인간과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

저에게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이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무지(無知)는 어떤 의미로 순수함을 의미한다. 선과 악, 그 무엇도 알지 못함은 백지의 상태이며, 그 순백의 공간에 대한 공포심은 인간을 향했다. 인간은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면서도 또한, 그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익살스러움

  요조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부적절함을 잊기 위하여 인간을 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서 술, 담배, 여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아니, 인간에 대해 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요조는 알아가려는 그 시도조차 두려워하며 포기했다. 단지 그것들은 공포심과 불안을 잠깐이나마 잠재우는 약과 같은 것이었다. 자신의 발목을 끌어당기는 공포로부터 도망치려는, 벗어나려는 요조의 모습은 타인의 눈에는 타락해가는 아들, 남자, 인간이었다.

  처음 요조가 자신의 공포심을 누르고 숨기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익살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이 인간으로서 생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숨기고자 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놓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리 해도 단념할 수 없었던 듯합니다.

 

  자신의 익살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떨며 지내왔던 요조는 중학교 학급 친구의 일부러 그런 거지?”라는 말을 듣게 된다. 요조가 담배와 술, 여자와 마약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이보다 훗날이지만 이 한 마디가 제일 큰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언젠가는 자신의 연기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언젠가 막을 내릴 자신의 연기를 알고 본능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려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곧 죽음이라는 답에 다다랐던 것이다.

 

人間失格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고민하게 했던 질문이었다. 본질적이면서 철학적인 이 질문은 요조가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고 싶은 인간이라는 존재, 인간이 무엇이기에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지 못하는 것이 그를 괴롭히는지.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인간실격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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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이은소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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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아픔을 이해하기까지


심의(心醫)

우리는 모두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 지 누구도 정의내리지 못한다. 무엇인지 모르기에 저도 모르는 새에 병들어버리고 마는 마음을 고치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 마음을 고치는 이를 심의(心醫)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는 이미 마음의 병이 사회적인 문제로서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오래 전,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도 마음의 아픔을 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심의가 되는 길은 배울 수도 없을뿐더러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야.

병자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돌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해.”

 

단지 듣는 것의 힘

세풍의 치료법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특별했다. 트라우마로 인해 침을 잡지 못하게 된 세풍은 의원으로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런 와중 계 의원으로부터 심의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세풍은 고민했다. 심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고칠 수가 있겠는지. 하지만 세풍은 잘 해내었다. 세풍의 타고난 따뜻한 심성은 병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도록 하였다. 단지 병자의 말을 듣기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자들의 마음의 병은 낫기 시작했다.

마음의 병은 자신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끌어안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은 세풍이 병자들의 마음의 병을 고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별 것 없이, 그저 병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모습만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모습 속에서 타인의 말을 듣고 아픔에 공감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아픈 마음을 보여 주십시오. 홀로 담아두고 앓는 것보다는 한결 나을 것입니다.”

 

아픔을 이해하기

아픔을 가진 사람이 아픔을 가진 사람을 더 잘 이해한다. 자신이 가진 아픔의 슬픔을 알기에 타인의 아픔에도 공감하며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타인의 아픔만을 본다. 이는 곧 자신의 마음의 병도, 타인의 마음의 병도 고칠 수 없게 하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아무도 의원님처럼 말해 주지 않았어요. 고마워요.”

 

있는 그대로의 아픔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은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을 다루지 않는다. 여성, 아내, 천민, 양반, 남편,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마음의 병이 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돈이 많고 잘 산다고 해서 마음의 병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고, 돈이 없고 못 산다고 해서 마음의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상황에서 자신을 괴롭게 하거나 아프게 하는 일들이 생겼을 때 그것이 말로서 되지 못하고 마음 속에만 갇혀 있을 때 마음의 병을 알리는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좋은 환경의 누군가의 아픔이 자신보다 덜할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되며, 아픔을 비교하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일도 누군가에게는 큰 일이 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각박한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픔에 귀 기울이기

자신 주변의 누군가가 말 못할 아픔을 홀로 껴안고 있지는 않은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고,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쌍방향적인 소통이 아닌 홀로의 소통이 되었을 때 그 욕구는 마음을 병들게 한다. 나의 마음이 가진 아픔의 소리를 느끼는 것부터 내 주변의 누군가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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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반양장)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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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는 같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밤새 어머니의 관을 지키며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날이 밝아왔다. 장례를 치르는데 울고 있는 어머니의 친구를 보았다. 어머니에게도 남자가 있었구나 생각했다. 날이 너무 더웠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다음 날 관심이 있었던 여자를 만났다. 그래서 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설에서만 있을 것 같은 이야기는 소설 이방인의 내용이다.

 

 

 

  「이방인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어서 여러 번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책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시도하지 못했던 이유는 책의 제목이 풍기는 분위기가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방인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 이방인의 첫 문장이었다. 책은 술술 읽혔는데 어느 순간 그렇지 않았다. 주인공인 뫼르소가 아랍인에게 총을 쏠 때부터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다. 뫼르소의 시점을 따라 이야기를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다. 이게 뭘까. 전개가 이상하지도 않았고 이상하게 느끼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런 살인사건이 이해가 되질 않다보니 결말까지 읽어도 책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책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래도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랐다. 보통의 소설이 이야기 전개에 충실했다면 이방인은 뫼르소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뫼르소의 살해 동기가 이해가 되었다.

 

 

 

아마 이방인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러나 모두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그 이유를.

 

  사람을 살면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을 느낀다. 때론 그 감정에 의해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다시 차분한 상태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 평소라면 말이 안 되는 행동일지라도 그 당시의 자신의 감정을 떠올리면 그러한 행동이 이해가 된 적이 누구나 한 번씩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은 마치 억지처럼 보이는 전개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은 감정적인 존재이면서 이기적인 존재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뫼르소의 살인사건에서 사람들은 뫼르소의 어머니의 죽음만을 본다. 어머니의 관 앞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장례에서 울지도 않고, 다음 날 바로 여자와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다 뫼르소가 살해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들이었어도 지금처럼 생각했을까? 글자로 읽을 수 없는 뫼르소의 감정을 이해하며 살인동기를 이해하고 단순히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방인은 소설 속 인물들이 아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우리들의 모습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아직 부족한 나로서는 알베르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책은 각자에게 저마다의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 있어 이방인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드는 책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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