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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평점 :
2017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온 책
『동급생 (Reunion)』 [프레드 울만 저/황보석 역/열린책들/2017]
동급생
유대인인 한스
슈바르츠는 어느 날 전학 온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를 보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우정을 나눌 상대라는 것을 확신한다. 한스는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를 이제껏 기다려왔으며 그 친구가 바로 콘라딘임을 확신하여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언젠가 콘라딘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한스는 아버지가 격식을 갖춰 귀족 대하듯이
자신의 친구를 대하는 것에 충격을 받지만, 콘라딘의 배려로 곧 괜찮아진다. 한스는 콘라딘이 자신을 부모님에게 소개시키는 것을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화를 내지만, 이내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 때문인 것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우정만 펼쳐질 것 같은 한스의 눈 앞에 점점 변해가는 현실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 자신은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더 이상 한스가 독일에서 살기가 힘들어질 것이라 생각한 부모님은 한스를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보내게 된다. 한스는 떠나기 전, 콘라딘에게서
편지를 받지만 한스는 편지를 읽으면서도 자신의 우정이 끝났음을 생각한다. 훗날 어른이 된 한스는 전쟁으로
인해 죽은 동문들의 이름들을 보게 된다. 콘라딘의 이름을 피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다시 책을 열어 콘라딘의
이름을 찾아 보게 된다.
이상과 현실
한스는
이상적인 우정을 꿈꾸는 소년이다. 자신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와의 우정. 비록 많은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한스에게 있어서 우정이란 현실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실 소설 중간중간, 그리고 뒤로 갈수록 곳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지만, 한스가 화자인 소설 속에서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유대인이나, 나치, 히틀러 같은 것이 아니라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다. 한스가 콘라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과 생각들, 두 소년의 우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가벼운 여러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소설이 홀로코스트 징조를 가지고 있음을 저도 모르게 잊게 된다.
두
소년과 별개로 소설 속 현실들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심해지는 나치즘, 어른 사이에서의 정치 감정이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스며드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소설의 중심축을 잡고 있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러한
배경들을 암울하게만 보이도록 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히틀러와 나치즘의 등장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한스에게는 콘라딘이 자신을 부모님에게 소개시키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였을 뿐이다. 작가 또한, 이렇게 무거운 주제를 의미를 가지되 무겁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은 한스가 살고 있는 동네를 묘사하는 문장들이다. 한스와 콘라딘이 지나다니는 거리 하나하나, 풍경 하나하나 여러 미사어구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상상하면서 읽다 보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부서지고, 무너진 거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웃으며 걷는 봄날 같은 거리가 펼쳐져 있다.
현실과 이상
독일인들의 유대인
탄압이 심해질 거라 생각한 한스의 부모님은 한스를 미국의 친척집으로 보내게 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현실에 부딪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두 소년의 우정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은 부서지고 마는 부분에서야
비로소 현실의 암울함을 독자는 느끼게 된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 동안 독자는 그러한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고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만을 응원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결국, 한스와
콘라딘이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모습은 잊으려 했던 어두운 현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소년
시절에만 간직할 수 있는 이상이었을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그
미성숙함에서 현실을 알게 되어 이상은 그저 추억 속에 남겨진 흔적 같은 것이었을까.
현실과 상관 없이
행복하게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가 점점 곤두박질 치는 것을 보면서 결국, 헛된 이상이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작가는 소설 마지막 한 줄로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부분은 마지막 몇 장도, 마지막 몇 줄도 아닌 마지막 단, 한 줄이다. 마지막 그 한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독자는 현실을
이겨낸 이상을 보게 된다. 소설의 제일 첫 줄에 쓰여져 있는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라는 문장의 이유를 소설의 맨 마지막 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정
한스는 늘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를 꿈꿔오며 콘라딘과 친구가 되기를 원했지만, 미국으로 떠나면서도 한스는 콘라딘이
자신을 진정한 친구라 생각하는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책을 읽는 내내 느꼈다. 그럴 것이 한스는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스가 그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도망쳐 나와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그 한 줄에서 한스는 콘라딘이 자신을 진심으로 친구로서 생각했다는 것과 제가 갖고 있던
친구에 대한 이상을 콘라딘이 실현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콘라딘에게 한스는.
작은 걸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을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뤘다. 하지만 진실성의 가벼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을
위해 우정을 무겁게 어두운 현실을 가볍게 쓴 소설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잊고 살았던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졌다. 왠지 이 소설을 읽은
오늘은 친구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본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