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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ㅣ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평점 :
정혜윤이란 이름은 듣자마자 잊을 수가 없었다. 우리집 고양이 혜윤이랑 같은 이름이어서... 그래서 이름만 듣고도 절로 호감이 갔다. 그러다가 아무튼 시리즈에서 '메모'에 관해 썼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읽어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메모에 대해 어떤 낭만을 품고 있기 때문에....
메모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메모에 대한 어떤 로망은 있다. 우선 ‘메모’라는 말소리가 좋다. 메모.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소리. 외국어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한국어. 울림 소리가 무언가를 채워주고 싶게 만든다. 한글로 쓴 '메모'는 미음이 두 개나 들어있는데 마찬가지로 그 안을 채우고 싶다. 동시에 그 네모에는 어떤 여유가 느껴진다. 반드시 꽉 채워야할 필요는 없는 여유, 뭐든지 받아줄 것 같은 여유. ‘메모가 뭐야?’라고 물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 종이에다가 하는 간단한 기록’이다. 혹은 ‘어떤 책이나 수첩에 짤막하게 적은 단어’ 같은 이미지도 떠오른다. 이런 메모의 행위나 결과물에도 어떤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느슨한 단어가 주는 편안함. 이처럼 내게 메모는 말소리와 글자 모양과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 이 세 개가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지면서 각각의 여유로움을 갖고 있는 매력적인 단어다.
메모에 대한 로망을 갖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어렸을 때부터 들은 '메모하라'는 말 때문이다. 많은 자기계발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메모하는 습관인데, 그 성공한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니,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사용하라'와 같이 실행하기도 어렵고 삶을 꽉 죄는 생활습관에 비해 '메모하라'는 조금 귀찮더라도 해볼만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생각했던 걸 잊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메모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기에 자기계발서에 나온 내용이라도 거부감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가 메모와 꽤 멀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은 나의 보수적인 무의식, 고리타분한 편견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메모'라는 말을 들으면 수첩에 손으로 쓰는 것을 상상했는데(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다!) 지금도 그런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실제로 하면 귀찮고 하찮으며 무질서한 일이지만 머리속으로 상상했을 땐 꽤 낭만적이고 진지한 일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흘러 에버노트처럼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쓸 수 있는 메모장을 이용해오긴 했지만 손으로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은 여전히 잘 안하기에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메모하는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메모하는지, 무엇을 메모하는지, 메모한 건 어떻게 관리하는지. <아무튼, 메모>에는 정혜윤식의 그 모든 것이 있었다. 편리하고 능률 좋은 메모 어플을 소개하진 않지만, 손으로 직접 메모들을 쓰게 된 계기, 메모를 해온 방법(문장 노트들), 메모의 내용까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자꾸 이건 내가 떠올렸던 메모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메모라기보단 필사? 글쓰기? 간단하고 쉽게 할 수 있는 메모처럼 보이지 않았다. 메모초보자의 눈에는 너무 대단한 메모들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메모가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게 메모란... 해놓고도 금방 잊혀지는 것인데... 메모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하는 거구나... 꽤 정성이 필요한 일이네... 그런 생각들이 스쳤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애지중지한 문장 노트에 관한 이야기가 좋았다. 수집한 문장을 손으로 쓰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빈공간에 펼쳐나가고, 읽고 또 읽는 일. 그리고 그 메모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 일. 메모를 한 뒤 내가 잘 안하는 일 중 하나가 메모한 걸 읽는 일인데... 작가는 메모한 걸 보고 또 보며 아주 열심이었다.
아주 잠깐 나도 작가처럼 문장을 메모하는 노트를 만들어볼까 했지만, 손으로 무엇을 쓰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내가 쓴 글씨를 보는 일도 좋아하지 않는 나이기에 관뒀다. 그래도 물리적인 종이로 보는 건 좋은 것 같다. 손으로 쓰진 못해도 컴퓨터로 써서 프린트해서 봐야지. 핸드폰 타자기로 아이디어를 기록한 후 화면으로 보는 일은 낭만이 사라진 느낌이다. 물론 손으로 쓰는 것보다 (검색하기도, 다시보기도, 수정하기도) 아주 편리한 건 반박불가지만... 그리고 블로그도 메모장처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개 블로그를 쓰는 이유는, 비공개 블로그는 쓰는 정성이 줄고 써놓아도 다시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공개 블로그에 쓰는 글은 부족하더라도 나름의 정성을 쏟아서 쓴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볼 의향이 생긴다. 하지만 비공개 블로그에 쓴 글은 대충 쓰고 퇴고도 거의 안하고 내용도 거칠어서 다시 보기가 부끄럽다. 이렇게 잊혀지고 버려지는 메모의 쓸모는 무엇일까. 하지만 메모가 일일이 쓸모를 다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 그래도 이왕 메모를 남길 거면 쓸모 있는 메모를 남기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욕망이고....블로그나 열심히 해야겠다. 많이 기록하고 많이 남겨야지. 내겐 블로그가 메모장 같은 존재... (하지만 제일 이상적인 것은 비공개 블로그나 사적인 메모장을 더 활발하게 쓰고, 과거에 내가 쓴 메모를 참조하고, 내가 쓴 걸 다시 읽고 뻗어나가는 게 아닐까. 공개된 공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니깐. 나도 메모 고수가 되고 싶다는 말이다..)
한편 이 책은 그 내용이 조금 두루뭉술하고 뜬구름 잡는 느낌이라 아쉽기도 했다. 꿈에 대한 이야기, 너와 나 우리에 대한 이야기, 좋은 것과 나쁜 것, 더 나은 사람이 되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 등등... 명확한 주제없이 삶에 대한 추상적인 이야기들을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지나가니 읽고나서도 내가 뭘읽었나 싶었다. 자기계발서 느낌도 나고... 맥락 없는 메모를 읽을 때의 기분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고(그럼..! 이 책은 아무튼 '메모'니깐). 그럼에도 책의 후반부에 실린 태평양전쟁과 조선인 전범에 대한 메모는 아주 강렬하게 읽었다. 내가 한번도 의식해본적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작가의 책보다 작가의 본업인 라디오 다큐멘터리가 더 궁금해졌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직접적이고 실제적으로 메시지를 알리는 모습도 너무 멋졌다. 이 작은 책으로는 그가 진짜 힘을 쏟고 있는 것의 아주 일부조차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정혜윤 작가를, 그가 보는 세상을 더 알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