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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ㅣ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평점 :
틈틈이 싸이월드 백업을 하고 있다. 미니홈피 고유의 감성은 일찍이 사라졌지만, 이번달이 지나면 그 안에 있는 글과 사진까지 아주 사라질 것이기에, 막차를 타러 가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백업을 하고 있다. 백업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아카이브 취향>도 읽(고있)었으니, 하나씩 일일이 클릭하며 글을 복사하거나 사진을 저장한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니홈피를 참 열심히 했다. 중학생 땐 사진과 글 모두 열심히였고, 고등학생 땐 사진만 열심히였다. 총 2000개에 달하는 사진과, 300개가 넘는 게시글, 그리고 500개가 훌쩍 넘어가는 다이어리. 까마득한 양이지만 시간이 없으니 일단 긴 글부터 빠르게 백업 한다. 긴 글 백업이 얼추 되었으면 다음은 사진이다. 사진은 처음엔 빠짐없이 저장하지만, 줄지 않는 양을 보며 이내 요령을 궁리한다. 찍은 순간이 떠오를 정도로 생생한 사진들과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는 생경한 사진들. 그중에는 종종 친구네 미니홈피에서 스크랩해 온 사진들도 있다. 스크랩한 사진들 중 나와 무관한 사진들은 저장하지 않고 지나간다. 무관하더라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면 저장한다. 다음은 내가 찍었지만 내가 나오지 않은 사진들을 두고 고민한다. 이걸 저장할까, 말까. 긴가민가 할땐 저장한다. 내가 찍었지만 설레지 않다면 지나간다. 문제는 나에게 부끄러움이나 불쾌감을 주는 사진들이다. 사진 속의 나를 보며, 내가 이랬구나, 가 아니라, 내가 이랬다고?하는 사진들..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사진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어쨌든 내게 강렬한 인상을 준 사진이니 저장해서 과거의 나를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두어 추억으로만 간직해야하나. 망설임 끝에 저장한다. 저장을 하고 나중에 싫어지면 지우지 뭐. 그렇게 백업 일은 줄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하고 있고, 아직도 봐야할 사진과 글들이 많지만, 지친다기보단 재밌다. 특히 고등학교 때의 사진들 속엔 내가 참 많다. 카메라 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늘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라 여겼는데, 그 시절의 나는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었고 쑥스러움을 애써 가리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는 고등학교 생활을 아싸처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진 속의 나는 많은 친구들과 스스럼 없이 포즈를 취했고, 심지어 인사만 몇 번 해본 친구들까지 데려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언제 서버가 무너질지 모르는 스릴감 속에서 나는 매일 밤 잊지 않고 백업을 하고 있다. 잠자고 있던 기억들을 깨워준다는 점에서 미니홈피의 존재가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니홈피라는 이 가상공간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미니홈피를 이토록 열심히 들춰봤을까. 무언가를 저장하고 기록하는 일은 재밌는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것을 보는 일은 재미를 넘어 가슴 벅찬 일이다.
이렇게 나는 아카이브를 좋아한다. 하지만 주된 아카이브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내가 마주하고 느낀 것들, 본 것들, 읽은 것들, 만든 것들, 찍은 것들, 쓴 것들을 기록하고 붙잡아두는 일이 좋다. 그래서 <아카이브 취향>은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지만, 필연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책이었다. '아카이브'라는 말소리가 예쁜 단어와 '취향'이라는 친해지고 싶은 단어가 모여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제목이 되었다니...정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뜻밖의 감동을 받았다. 내가 기대한 감동과 정반대의 감동이었다. 나는 이 책이 기록과 보관에 대한 책인 줄 알았건만, 펼쳐보니 이 책은 축적된 아카이브를 읽어가는 역사가에 관한 책이었다. 아카이브라고 하면, 늘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만 생각했지, 기록되고 보관된 것들을 수집하고 해석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 책이 말하는 아카이브 작업은 엄연히 후자를 가리켰다. 이런 아카이브 작업은 역사가의 일 중 하나인데, 역사가의 책은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게다가 저자가 작업하는 자료들은 정말 날것 그대로의 자료들, 나처럼 아카이브를 위해 기록하는 자료가 아니라,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기록된 것들을 아카이브한 자료들이었는데, 이런 정제되지 않은 자료들이 자주 날 흥분시켰다.
이 책이 출간된 건 1989년이고, 저자는 그 당시도 정보화시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클릭 몇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는 아니다. 파르주가 18세기 형사사건 아카이브를 작업하는 일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미로 같은 열람실에 들어가, 가혹한 정적 속에서 고독하게 필사자료를 베껴 쓰는 일이다. 그가 200년 전부터 존재해온 문서들을 마주했을 때의 실감나는 묘사는 마치 내가 그 자료를 눈앞에서 보고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그렇게 무수한 아카이브 사이에서, 지난하고 느린 베껴 쓰기 작업부터, 흔적을 보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 표면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 그 아래의 어법과 논리를 찾아가는 작업까지 이 역사가는 아카이브와 관련된 많은 작업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강렬했던 대목은 오래된 서류 뭉치를 들추어보는 작업과 그 서류 뭉치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씨앗과 헝겊 편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자료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이라면, 키보드와의 사투 혹은 복사와 붙여넣기와 저장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비로운 작업이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10년 전 사진을 만나는 것도 가슴 벅찬 일인데, 200년을 건너온 바스라지기도 하고 구겨지기도 한 종이 뭉치 아카이브를 눈 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파르주와 푸코에 따르면 경이로운 일이고, 육체적인 일이며, 몸 안의 세포를 전율시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아카이브가 가진 모순, 형사사건 아카이브의 특징, 아카이브를 통해 드러나는 공권력과 개인간의 관계, 아카이브의 인용 작업, 비밀경찰 일지 아카이브와 대중문화 등 책 전체가 온통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아카이브의 세계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무진했다. 얇은 책이지만 아를레트 파르주의 촘촘한 문장들 덕분에 아카이브의 수많은 터널 중 하나를 통과한 기분이다. 더불어 200년 뒤의 내 사진들과 내 글들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았다. 그 미래가 너무 아득하여 그냥 사라져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