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 지음, 정지인 옮김 / 원더박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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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정지돈이 인스타그램에 '민주주의는 취향이 후지다'라는 타이틀이 적힌 페이지를 찍은 사진을 올린 것을 보고 재밌어 보여서 찾아 읽게 된 책이다. 동시대 미술을 중심으로 미술계와 예술계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냈는데 책도 작고 가벼워서 부담없이 읽었다.


나는 영화도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하고 미술관 가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나마 영화와 소설은 좋아하는 캐릭터라든지, 문장이라든지, 장면이라든지 할 말이 있지만 미술은 참 대화 나누기가 어렵다. 어떤 작품을 보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작품이 좋은지 안좋은지 조차 판단이 안 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보다 더 추상적인 '예술'이란 단어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사실 나는 예술가 지망생(이런 말 자체가 조금 모순될 수 있지만 어쨌든!)과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인데(아니면 애초에 사람 자체와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싫어하는 게 너무 많고 불만은 더 많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너무나 자유롭다는 걸 과시(나는 이렇게 자유로운데 너는 참 보수적이고 꽉 막힌 애구나)하는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묻지도 않았는데 원나잇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친구라든가... 너 그 작가 몰라? 모를리가 없는데!! 라며 듣는 사람을 무안하게 만든다든가...). 그래서 사실 나는 예술을 좋아하지만 혼자 좋아하고 혼자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스스로 고립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지만, 아무렴 어때, 나는 예술로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어쨌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반가웠다. 간혹 한줄평에서 책 제목이 별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제목의 구구절절한 느낌마저 좋았다.


위에 내가 나열한 예술가(지망생)들에 대한 (경험에 기반한) 편견과 달리 이 책의 저자 그레이슨 페리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대화를 안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예술의 장벽이 굉장히 높아 보이기 때문일텐데, 그레이슨 페리는 그 장벽을 와장창 무너뜨려줬다. 그에 따르면 나는 중급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겠고(p.81 중급 교양인들의 핵심적인 특징이라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린아이들의 관념에 충실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술은 그림이거나 조각이어야 하고, 최소한 너무 도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자주 '아름답다'고 말하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했다(p.25 어떤 작품을 미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 계급적 특권으로 더럽혀져 불명예스럽고 곰팡이 풍기는 모종의 위계질서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 식의 미 개념은 배후에 다른 의미들을 잔뜩 숨기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미 개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생각해 보라). 한편 너무 공감되고 통쾌한 부분도 있었는데 미술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글들에 대해 말한 부분이었다(p.49 1960년대 미술 비평에서 시작된 이 국제 예술 영어는 예술을 평가하는 일부 저술가들의 권위를 부풀려 주었다. 우리도 읽어 봐서 알지만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건 아주 진귀한 능력이다. 국제 예술 영어는 진지함의 언어가 되었고, 예술 작품에 '복잡성'이라는 파티나를 발라 준다. (...) 국제 예술 영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재밌게도 정지돈의 <영화와 시>에서 본 내용도 이 책에서 한번 더 만날 수 있었다(p.48 진지함이야말로 예술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통화다).


이밖에도 미술계에서 큐레이터와 딜러와 수집가들의 존재에 대해, 돈의 힘에 대해, SNS의 영향과 전시장이라는 공간, 전시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순간과 관객이 없는 순간, 기업이 예술가와 콜라보하는 것 등등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보게 되었고, 예술가로서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고충들을 가식이나 신비주의 없이 허심탄회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예술을 할 때 자의식이 얼마나 적이 되는지, 동시에 예술계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려면 그런 자의식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자의식이나 예술의 역사나 경향 같은 것들에 관심이 없어도 예술을 할 수 있으며 그레이슨 페리는 그런 예술가를 아웃사이더 예술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게 그런 아웃사이더 예술가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돈에 좌우되는 미술계가 신기했다. 영화는 '산업'이라고 부를 만큼 거대한 대기업이 움직이고, 제작비와 관객수와 손익분기점이 비교적 투명하게 보이는 것에 비해, 또 문단계는 작가들이 스스로 연재노동자라고 부를 만큼 돈 벌이가 못되는 것에 비해, 미술계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다소 모호한 이유로(저자는 이를 파티나라고 불렀다) 작품의 가치와 가격이 덩달아 올라가는 게 신기했다. 이는 전시장이라는 굉장히 한정된 공간과 책이나 영화와 달리 쉽게 복제되기 힘들다는 매체적 특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유로.. 그러니깐 어떤 작품을 보고 내가 직접 느낀 감상과 이 작품의 값어치의 차이가 클 때 느껴지는 어떤 당황스러움, 말문막힘, 의 감정들...의 이유로 미술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더 어려워하는 것 같다.


이 작은 책 한 권을 읽는다고 복잡한 예술계와 미술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저자는 찜찜한 질문들을 많이 던지지만, 그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은 드물다. 여전히 나는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잘 모르겠으며, 미술과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두렵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어떤 용기는 얻은 것 같다. 대단해 보이는 것들 중에도 사실 별거 아닌 것들이 있고(저자는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가 더이상 예술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했다)... 일상적인 것들 심지어 하찮아 보이는 것들도 대단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해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말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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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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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학기 때, 그러니까 막 막학기를 끝내고 수료 1학기를 시작할 때 불문과 수업 하나를 청강했다. 한학기 내내 보들레르 시를 읽는 수업이었는데 나는 불어를 할 줄 몰랐지만 교수님이 좋아 종강날까지 계속 들었다. 역시 불어를 몰랐기에 그때 원문으로 배운 보들레르의 시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식이었다). 하지만 수업 중에 들으면서 알게된 자잘한 이야기들, 예를 들면 보들레르와 플로베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모두 1821년에 태어났다는 사실, 발자크는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썼다는 사실, <마담 보바리>가 소송에 휘말렸다는 사실 같은 걸 배우며 재미있어 했다. 그러면서 종강 쯤에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이 몇 개 생겼는데 <마담 보바리>는 그중 하나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알고 있던 <마담 보바리>의 내용은 싸구려 삼류 소설만 읽어서 헛된 욕망을 품다가 이리저리 바람나서 결국 비극을 맞는 보바리 부인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책을 읽어보니 이런 요약이 악의적으로 과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읽는내내 소설 속 엠마(보바리 부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엠마가 남몰래 수도원에서 흥청망청 읽어간 소설들이 지금 우리가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보는 인스타그램이 뭐가 다른지... 그래서 엠마가 품는 실현되지 못하는 욕망과 허영까지 공감할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을 쉽사리 놓을 수 없듯이 그런 소설과 환영들을 쉽사리 놓을 수 없는 심정까지도. 소설의 중반부쯤에서 엠마는 이게 모두 소설책들로 인해 만들어진 욕망과 허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때 엠마의 고통은 누그러지는 게 아니라 더욱 심해진다. 통제 불가능한 욕망과 허영은 그칠 줄 모르고 권태 앞에서 엠마는 더욱 자극적인 걸 원하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애인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고 사치를 멈추지 못하며 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나는 이 모든 게 엠마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만약 엠마가 나처럼 그런 것에 얼씬도 못하는 위치라면 이정도의 파멸까지 맞이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로돌프처럼 주변에 얼씬 거리는 돈많고 멋진 사람도 없으며, 뢰르처럼 값비싼 물건들을 사보라고 끊임없이 들이대는 장사꾼도 없다. 그러니 미디어나 SNS를 통해 욕망이 부풀어져도 나는 속수무책으로 단념한다. 그러나 엠마의 욕망은 종종 충족된다. 이 종종 충족되는 상황이 엠마의 욕망에 기름을 부은 것 같다.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학교에서 빌려와 읽었었는데 번역서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너무 섬세하고 수려해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직접 사서 다시 읽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불문과 친구한테 해주었더니 자신도 수업시간에 <마담 보바리>를 읽었고 작품도 수업도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쓸때 단어들을 쭉 나열한 후 문장에 하나씩 넣어보고 직접 소리 내서 읽어보면서 말의 흐름과 리듬에 딱 맞는 단어를 골라서 썼다는 말을 해줬다. 이정도면 바느질 한땀한땀을 넘어 실을 한가닥씩 손수 뽑아서 쓴 수준아닌가. 그런 작가의 노력과 고통과 헌신 덕분인지 정말로 번역서임에도 이야기뿐만 아니라 문장 읽는 재미도 컸던 소설이다. 프랑스 애들은 얼마나 더 기가막히고 감탄스러울까. 그리고 농사 공진회 장면은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을 보는 것 같았는데 낯설면서도 세련되게 느껴졌다. 책 뒤에 함께 실린 해설도 흥미롭게 읽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나 감정에 집중해서 읽게 되는데 뒤에 실린 해설은 글의 구조나 스타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서 인물의 시점에 관한 것이나 인물의 구도 등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들에 대해 음미할 수 있었다. 플로베르의 소설로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소설로 <감정교육>이 있는데 그것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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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시 말들의 흐름 3
정지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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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는 영화도 시도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뉴스와 SNS에서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믿기 힘든 사실들 때문이었겠지만, 정지돈의 글이 그런 권력형 문제(혹은 범죄)들과 무관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특히나 정지돈은 자신이 속한 문단 권력에 대해, 그리고 젠더 권력에 대해 피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정지돈은 내가 읽은 남자 작가 중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작가다. 대구에서 외동으로 나고 자란 이성애자 남성 작가. 이렇게 날 때부터 주류였던 태생적 요인 때문일까. 책 곳곳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찾아 볼 수 있다. 덕분에 나도 많이 반성했고 권력과 권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권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은 권력은 의식하지 않으면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장 내가 구체적으로 속한 소속이 없기도 했고. 요즘은 뉴스와 SNS를 통해 권력의 존재를 실감하고 있지만, 만약 이런 식으로 공론화 되는 일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 잘 모르는 채 무심하게 순진하게 살았을 것 같다. 정치는 원래 썩었지, 그래도 저 사람은 옳은 말 하네, 지금까지 없던 퀴어 소설이잖아? 등으로 주류의 말에만 귀 기울이며 안이하게 살았을 것 같다. 심지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번에는 불과 일이주 사이에 쏟아진 일들이 너무나 셌기에 잊기 힘들 것 같지만, 이번엔 진짜 잊지 말아야지. 또 권력이란 것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절로 갖게 되는 면이 있다보니 눈에 보이는 피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비판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마치 정지돈이 대구에서 외동으로 나고 자란 이성애자 남성 작가라는 사실 자체를 비판할 순 없는 것처럼. 하지만 주류와 권력은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닌데, 이렇게 침묵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 있다는 것인데, 나는 지금까지 자꾸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나 문단계처럼 여긴 아니겠지, 라고 믿었던 곳에선 더욱 그러했고.


정지돈의 책을 읽으면서 시네마테크를 열심히 다닌 나를, 문학 수상작품집을 찾아 읽는 나를 되돌아봤다. 정지돈이 복붙한 한창욱이 번역한 기리쉬 샴부의 글에 의하면 나는 낡은 시네필리아이거나 낡은 시네필리아에 복무하는 사람이다. 나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쉽게 권위에 편승해왔다. 이는 굉장히 편한 일이고 사실 누구나 거치는 일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잘 모른다면 우선 유명하거나 상 받은 작품부터 찾아보게 되니깐. 물론 이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문제는 이게 전통이되고 유구해지면서 점점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다가 누구도 건들 수 없는 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소비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무언가를 보고 읽고 쓰고 즐기는데 자유로워지고 주체적이 되는 것.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시네마테크에서 틀어주는 유럽 백인 남성 감독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하고, 세계문학전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하고, 문학수상작품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세뇌를 받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에 관해서는 상과 영화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것 같은데(시네마테크만 남았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네, <벌새>가 어디서 수십 개의 상을 받았네, 이런 것에 아무런 관심도 감흥도 없단 말이다(둘다 과대평가 받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전도연이 받는 상은 크든 작든 기쁘고 즐겁다(갑분전도연).


내가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계기 중 하나도 내가 직접 번 돈으로 완전하게 독립된 영화를 찍고 싶었던 것인데, 어디서 지원과 지지를 받는 영화가 아니라 온전히 내가 원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단 말이다. 제작지원으로부터 독립되고, 영화제로부터 독립된 진짜 독립 영화를 찍고 싶었다. 주변에만 해도 단편 영화를 찍을 때마다 제작지원을 받네마네, 영화제를 가네마네로 시달리는 젊은 영화 감독들이 많은데, 그런 것에 신경쓰고 상처받는 모습이 싫었다. 또 이런 것들 때문에 독립 영화인데도 그 결이나 내용이 다 비슷비슷해진 것 같고. 정지돈이 말한 시인 프랭크 오하라처럼, 나도 내 월급으로 감당할 수 있을 일상의 영화들을 찍고 싶다.


정지돈이 들려주는 시인 프랭크 오하라와 브로드스키의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처럼 보인다. 이것은 반시대적이거나 반체제적인 게 아니라 비시대적이고 비체제적인 것이라고 정지돈은 말한다. 정치적 냉소주의라는 한계가 있지만 정지돈은 오히려 사회 변화는 이런 태도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순간 내가 얼마 전에 영화 일기에 쓴 '전도연의 인터뷰' 글이 생각났다. 전도연과 브로드스키 사이에 어떤 접점이 보인다. 갑자기 그 글에 자신감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시에 대해 좀더 덧붙이자면, 나는 시집을 몇 권 갖고 있지만 거의 읽지 않는다. 어려우니깐... 등등의 이유로... 그런데 정지돈이 프랭크 오하라를 소개하면서 책에 같이 실은 시들이 참 좋았는데, 그런 시라면 나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의 시라니! 책장에 꽂힌 시집들보다 훨씬 낭만적이다. 나의 예술적 지향점 중 하나인 영화 <패터슨>의 패터슨과 비슷해서 또 좋았다.


<영화와 시>는 읽으면서 여러모로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는데 읽자마자 한 번 더 읽고 싶은 드문 책이었다. 지돈 씨 에세이 많이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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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영화 말들의 흐름 2
금정연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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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이 글은 금정연의 문장이 마구 인용되어 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나를 사로 잡은 세 가지. 저자 이름 금정연. 책 제목 <담배와 영화>. 부제목 '혹은 : 나는 어떻게 흡연을 멈추고 영화를 증오하게 되었나'.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부제목... 제목이 담배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건드린다면, 부제목은 담배나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론 어떤 것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끔찍이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담배와 영화가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봐왔으니.. 그리고 겪어왔으니... 그러면 보편적이고 대중적이고자 한 제목과 부제목의 콜라보인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책을 열심히 팔고 싶었던 금정연의 절규처럼 보이기도 하네... 어쨌든 나는 후자에 가깝다. 나는 비흡연자다. 그리고 영화는... 싫어지는 중.


영화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는 요즘 매일 영화 일기를 쓰고 있으니... 서평 안 쓰는 서평가인 금정연을 따라해보자면 영화 싫어하는 영화 일기러... 물론 도약의 가능성은 많다. 책이나 잡지에서 읽은 글로 영화를 상상했다던 임재철처럼... 그리고 십중팔구 그 상상이 영화보다 더 좋았다던 영화 광인 임재철처럼... 영화 광인이라니... 광인처럼이라니... 취소취소취소. 앞으로는 영화 안보는 영화 일기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여태 쓴 영화 일기는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 애처럼 쓴 것 같아 거짓말 하는 기분이지만 무슨 상관이람? 난들 알아? 인생은 계속된다. 일기도 계속된다. 아무튼 영화에 대한 말은 영화 일기만으로도 벅차다. 다만 금정연이 한때 이마에 문신으로 새기고 싶다고 했던 롤랑 바르트의 말과 내가 지금 매일 쓰고 있는 영화 일기에 대해서는 연결지어 말할 수 있겠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

=> 영화 일기를 쓰기 위해 (읽을 만한 글을) 희망할 필요도 없고, (내일도 모레도) 계속 쓰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


성공은 이미 버려졌다. 희망은 버리고 있다. 일기는 계속된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 끝 - 그렇다면?


그렇다면 비흡연자(인 내)가 생각하는 담배란?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도 가끔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주로 답답할 때 그런 것 같다. 무언가를 쪽 빨고 훅 뱉고 싶을 때... 무생물에 의지하고 싶을 때... 시작과 끝이 있는 것에 기대고 싶을 때... 내 몸에 나쁜 것을 주입하고 싶을 때... 금정연이 말한 에어 기타처럼... 나는 에어 담배... 에어 니코틴...


가끔 나는 어째서 비흡연자가 되었나 생각해보곤 한다(언제든지 흡연자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첫번째는 학습. 십여년 전 나는 학교 수업에 충실한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담배란? 담배는 나쁜 것. 혹은 담배는 기호 식품. 팩트는 담배는 몸을 썩게 하는 것... 아빠는 흡연자이고 나와 동생과 엄마는 자주 아빠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말하곤 했다. 아빠는 한번도 담배를 안 끊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아빠의 대답과 새해 다짐은 늘 똑같았다. 끊어야지, 새해엔 금연! 금정연의 말을 빌리면 마지막 이전의 마지막 담배... 엄마는 비흡연자이지만 나는 중학생 때 엄마가 동생과 나 몰래(아빠한테까지 숨겼는지는 모르겠다)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엄마는 비흡연자가 아닌건가. 하지만 적어도 엄마는 우리에게 비흡연자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엄마 몰래 엄마의 담배를 치우고, 엄마 손에서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떠보면 엄마는 잠시 당황할 뿐 내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내가 비흡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영향보다 엄마의 영향이 더 컸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그것도 대구경북에서는 아빠가 담배를 끊길 바라는 아이보다 엄마가 담배를 끊길 바라는 아이가 담배를 더욱 싫어하게 된다. 두번째는 냄새. 담배 연기 자체의 냄새는 조금 좋아한다. 타들어가는 냄새에서 오는 구수한 향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냄새를 나도 모르게 따라가다보면, 어디선가 들은, 필터를 통해 마시는 담배 연기보다 간접 흡연이 몸에 더 해롭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몸이 나빠지다니... 억울한 기분이 들어 담배 연기를 피한다. 무엇보다도 아빠 차에서 나는 담배 연기를 싫어했다. 그 오래되고 퀘퀘한 냄새는 나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아빠에게 안기면 나는 담배 냄새도 싫었다(하지만 그게 곧 아빠 냄새라고 받아들인 나는 이제 그 냄새가 싫지 않다).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는 냄새는 싫지 않지만, 그 냄새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게 싫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이 고양이털과 함께 사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는데도 오래 걸린 나는, 담배와 함께 사는 것이 담배 냄새와 함께 사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셋째는 중독. 제일 무서운 것이다. 중독과 의존은 내 자유를 뺏어가는 느낌이라고 막연하게 말해보지만... 안 겪어봐서 그 이상의 할 말도 없다.


이밖에도 건강에 대한 공포, 맛 없는 맛에 대한 질색, 줄줄 새는 유지비 등 비흡연자로 사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건 꼭 담배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니 스킵한다. 술을 포함해 온갖 유해하고, 꾸준히 돈이 들고, 첫 맛은 끔찍해도 갈수록 좋아지(긴하나요?)는 것들이 담배 말고도 많으니깐.


비흡연자로서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건 금정연이 담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시각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점이었다. 담배의 맛을 모르는 자도 담배의 연기는 볼 수 있다. 담배의 연기를 빨아들이지 않는 자도 담배의 재와 담배의 불은 볼 수 있다. 그래서 무리없이 읽었다. 다시금 책을 많이 팔고 싶은 금정연의 절규가 느껴지는 순간이다(물론 내멋대로 느끼는 절규).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이 책의 제목을 생각했을 때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금정연은 자주 담배와 영화에 대해 연결지어 말하려 했다. 이를테면 영화 속에 나오는 담배 피우는 장면부터 담배 연기와 극장의 스크린을 연결짓는 것까지. 그래서 함께 나오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따라 나오는 픽션에 대한 이야기. 왕가위와 웰즈와 엘미르 드 호리와 클리포드 어빙과 피카소와 오야를 이야기하며 금정연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야기를 하니... 왜 담배를 피우고 영화를 보나. 금정연의 글이나 읽지...


결국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내가 금정연에게 배우고 싶었던 것은 담배도 영화도 아니었다. 금정연의 글쓰기. 다시금 금정연은 내가 계속 읽고 싶은 작가라는 걸 느꼈다. 자칭 실잘알(실패를 잘 아는 사람)이지만 내 눈엔 성공한 글쓰기처럼 보였다. 그의 글을 읽을 때면 글쓰기의 해방감이 느껴진다. 다른 글들에선 느끼기 어려운 자유로움. 그러면서 유쾌함. 그러면서 짠함. 무엇보다도 진지하지 않아 좋았다. 문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려운 영화 책과 문학 책을 읽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많이 써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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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채석장 시리즈
아를레트 파르주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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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싸이월드 백업을 하고 있다. 미니홈피 고유의 감성은 일찍이 사라졌지만, 이번달이 지나면 그 안에 있는 글과 사진까지 아주 사라질 것이기에, 막차를 타러 가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백업을 하고 있다. 백업 프로그램이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아카이브 취향>도 읽(고있)었으니, 하나씩 일일이 클릭하며 글을 복사하거나 사진을 저장한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니홈피를 참 열심히 했다. 중학생 땐 사진과 글 모두 열심히였고, 고등학생 땐 사진만 열심히였다. 총 2000개에 달하는 사진과, 300개가 넘는 게시글, 그리고 500개가 훌쩍 넘어가는 다이어리. 까마득한 양이지만 시간이 없으니 일단 긴 글부터 빠르게 백업 한다. 긴 글 백업이 얼추 되었으면 다음은 사진이다. 사진은 처음엔 빠짐없이 저장하지만, 줄지 않는 양을 보며 이내 요령을 궁리한다. 찍은 순간이 떠오를 정도로 생생한 사진들과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는 생경한 사진들. 그중에는 종종 친구네 미니홈피에서 스크랩해 온 사진들도 있다. 스크랩한 사진들 중 나와 무관한 사진들은 저장하지 않고 지나간다. 무관하더라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면 저장한다. 다음은 내가 찍었지만 내가 나오지 않은 사진들을 두고 고민한다. 이걸 저장할까, 말까. 긴가민가 할땐 저장한다. 내가 찍었지만 설레지 않다면 지나간다. 문제는 나에게 부끄러움이나 불쾌감을 주는 사진들이다. 사진 속의 나를 보며, 내가 이랬구나, 가 아니라, 내가 이랬다고?하는 사진들..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사진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어쨌든 내게 강렬한 인상을 준 사진이니 저장해서 과거의 나를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두어 추억으로만 간직해야하나. 망설임 끝에 저장한다. 저장을 하고 나중에 싫어지면 지우지 뭐. 그렇게 백업 일은 줄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하고 있고, 아직도 봐야할 사진과 글들이 많지만, 지친다기보단 재밌다. 특히 고등학교 때의 사진들 속엔 내가 참 많다. 카메라 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늘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라 여겼는데, 그 시절의 나는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었고 쑥스러움을 애써 가리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는 고등학교 생활을 아싸처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진 속의 나는 많은 친구들과 스스럼 없이 포즈를 취했고, 심지어 인사만 몇 번 해본 친구들까지 데려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언제 서버가 무너질지 모르는 스릴감 속에서 나는 매일 밤 잊지 않고 백업을 하고 있다. 잠자고 있던 기억들을 깨워준다는 점에서 미니홈피의 존재가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니홈피라는 이 가상공간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미니홈피를 이토록 열심히 들춰봤을까. 무언가를 저장하고 기록하는 일은 재밌는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것을 보는 일은 재미를 넘어 가슴 벅찬 일이다.


이렇게 나는 아카이브를 좋아한다. 하지만 주된 아카이브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내가 마주하고 느낀 것들, 본 것들, 읽은 것들, 만든 것들, 찍은 것들, 쓴 것들을 기록하고 붙잡아두는 일이 좋다. 그래서 <아카이브 취향>은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지만, 필연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책이었다. '아카이브'라는 말소리가 예쁜 단어와 '취향'이라는 친해지고 싶은 단어가 모여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제목이 되었다니...정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뜻밖의 감동을 받았다. 내가 기대한 감동과 정반대의 감동이었다. 나는 이 책이 기록과 보관에 대한 책인 줄 알았건만, 펼쳐보니 이 책은 축적된 아카이브를 읽어가는 역사가에 관한 책이었다. 아카이브라고 하면, 늘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만 생각했지, 기록되고 보관된 것들을 수집하고 해석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 책이 말하는 아카이브 작업은 엄연히 후자를 가리켰다. 이런 아카이브 작업은 역사가의 일 중 하나인데, 역사가의 책은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게다가 저자가 작업하는 자료들은 정말 날것 그대로의 자료들, 나처럼 아카이브를 위해 기록하는 자료가 아니라,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기록된 것들을 아카이브한 자료들이었는데, 이런 정제되지 않은 자료들이 자주 날 흥분시켰다. 


이 책이 출간된 건 1989년이고, 저자는 그 당시도 정보화시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클릭 몇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는 아니다. 파르주가 18세기 형사사건 아카이브를 작업하는 일은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미로 같은 열람실에 들어가, 가혹한 정적 속에서 고독하게 필사자료를 베껴 쓰는 일이다. 그가 200년 전부터 존재해온 문서들을 마주했을 때의 실감나는 묘사는 마치 내가 그 자료를 눈앞에서 보고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그렇게 무수한 아카이브 사이에서, 지난하고 느린 베껴 쓰기 작업부터, 흔적을 보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 표면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 그 아래의 어법과 논리를 찾아가는 작업까지 이 역사가는 아카이브와 관련된 많은 작업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강렬했던 대목은 오래된 서류 뭉치를 들추어보는 작업과 그 서류 뭉치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씨앗과 헝겊 편지에 대해 서술한 것이었다. 자료를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이라면, 키보드와의 사투 혹은 복사와 붙여넣기와 저장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비로운 작업이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10년 전 사진을 만나는 것도 가슴 벅찬 일인데, 200년을 건너온 바스라지기도 하고 구겨지기도 한 종이 뭉치 아카이브를 눈 앞에서 마주하는 일은 파르주와 푸코에 따르면 경이로운 일이고, 육체적인 일이며, 몸 안의 세포를 전율시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아카이브가 가진 모순, 형사사건 아카이브의 특징, 아카이브를 통해 드러나는 공권력과 개인간의 관계, 아카이브의 인용 작업, 비밀경찰 일지 아카이브와 대중문화 등 책 전체가 온통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아카이브의 세계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무진했다. 얇은 책이지만 아를레트 파르주의 촘촘한 문장들 덕분에 아카이브의 수많은 터널 중 하나를 통과한 기분이다. 더불어 200년 뒤의 내 사진들과 내 글들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았다. 그 미래가 너무 아득하여 그냥 사라져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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