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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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르: SF, 판타지, 순문학

해당 출판사의 서평단으로 가제본을 제공받았습니다.

[기린의 심장]은 총 9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앞의 5개 단편은 SF, 판타지 나머지 4개의 단편은 순문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어느 시인의 죽음], [라하이나 눈] 그리고 [경계]이다.


[어느 시인의 죽음]과 [라하이나 눈]은 SF로 소재나 전개가 참신해서 매우 인상 깊었다. 특히 [어느 시인의 죽음]을 읽으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몬]이 떠올랐는데 선인과 악인을 오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포신에서 붉은 빔이 발사되었다. 빔에 닿은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오리지널과 전혀 다른 무엇이 되었다. 인류 문명은 팬케이크를 닮은 정체불명의 우주선으로 인해 한순간 병신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우주를 떠돌며 귀하게 살아가는 '가브'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너희가 제일 맛있었다. 최고의 식재료들이여.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으레 그러듯, 지도자들도 잘만 하면 이 난국을 말로 때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쉽게 말하면, 길러 먹으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걸 양식이라 부릅니다. 저희도 다른 종족을 같은 방식으로 식량화했습니다. 식욕을 죄라고 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문명을 이룩한 존재로서 교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싫다.

어느 시인의 죽음

왜 이렇게까지 달리는 거야? 러닝복으로 갈아입는 날 보며 선배가 물었다.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려고요.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전화를 건 순간 이미 모든 게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무릎이 아파왔다. 통증은 내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웠다. 오래전,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그 어느 시점에, 나는 이미 패배했음을. 이 지루한 술래잡기의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음을.

그럼에도 다시 달렸다.

그림자가 쫓고 있으니까, 나는 쫓기고 있으니까.

라하이나 눈

[경계]가 마음에 든 이유는 유일하게 결말이 해피 엔딩에 가까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구름 사이로 드리운 햇살이 먼산의 그림자를 지워가고 있었다. 그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너무 눈부셔, 재인은 그만 울고 말았다.

경계

9개의 단편에서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비극적이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읽으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작가가 이런 결말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SF 단편들이 마음에 들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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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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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정말 갈수록 나빠지는지 아니면 세상을 보는 내 관점이 문제인지 확실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



우리는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는 말을 ‘걱정 마, 안심해‘라거나 ‘신경 안 써도 돼‘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고 말할 때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상황이 나쁠 수도 있고 동시에 좋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을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미숙아라고 가정해보자. 모든 지표에서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 계속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아기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상황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아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쁘기도 하다.

세계의 현 상황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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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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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주인공인 '라우라'로 말하자면, 호텔 업계에서 수 년간 일해 온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다. 하지만, 라우라는 막상 목표로 하던 직급으로 진급하자마자 의욕을 잃고 퇴사를 결정한다. 소설 속 라우라는 과시적인 성향의 자신만만한 여성으로 표현된다. 또, 라우라 모녀는 사이가 매우 좋아서 라우라의 가치관은 대부분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쉬운 점은 이런 기성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치관이 내게는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다. 운동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성장을 목표로 삼지 않고 체형관리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든지 '마음이 아플 때조차 늘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라우라의 모습이 현대적인 여성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365일]이 기존 로맨스 소설과 차별화 되는 점은 똑똑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에 아주 솔직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라우라의 다소 경솔하고 성급한 모습이 반복되면서 주인공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라우라에게 걸맞는 멋지고 능력좋은 캐릭터, '마시모'를 설정한 것까진 좋았지만 지나치게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사랑'을 로맨틱하게 포장하는 점이 아쉬웠다.

[365일]의 '마시모'는 마피아 조직의 수장으로, 이러한 설정은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365일]은 [대부]와 달리 로맨스가 중심 이야기이므로 파벌 갈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처음부터 라우라와 마시모의 관계는 마시모가 라우라를 납치한 뒤, 라우라의 가족을 담보로 그를 협박하는 일방적인 관계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정말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라우라를 붙잡아두기 위해 임신을 시키려 했던 마시모의 계략이 드러났을 때는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라우라'라는 캐릭터는 다혈질이기는 하지만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마시모를 사랑한다는 생각에 그의 곁에 계속 머물기로 결심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존 로맨스 소설과 달리 '똑똑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점은 높이 사지만, 1부만 읽었을 때 '라우라'가 기존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에 비해 주도적인 캐릭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인 라우라가 자신의 만족보다 파트너인 마시모의 만족을 우선으로 두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이 책의 타겟 독자가 '여성'인지 의문스러웠다.

이러한 라우라의 행동에 대해서는 책의 끝부분에 이르러 과거가 드러나면서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열여섯 살의 라우라는 아홉 살 연상의 '피오르트'와 교제하면서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이나 데이트 폭력에 시달렸고 이후의 관계에서도 이런 경험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요. 언제 나한테 결정권이 있기는 했어요? 당신이 내 의견을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을 내리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하겠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결정권이 있었다면 이런 삶 따위는 고르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젠 지긋지긋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한테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는 게 끔찍해! 내 인생인데 내가 결정도 못 하고 이게 다 뭐야!"

[365일] 시리즈는 총 3부작으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 해당하는 [365일]에서는 라우라가 임신 사실을 마시모에게 고백하면서 끝이 난다. 라우라의 말대로 '과거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현재에 최선인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라우라가 마시모의 곁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모쪼록 라우라가 행복해지면 좋겠다. 아직 1/3밖에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았으니 다음 작품에서는 라우라의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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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1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 4
리처드 파인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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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계의 유명인사 리처드 파인만의 회고록/에세이. 그의 재치만점 일화를 읽을수록 정신없이 빠져드는 책. 

하지만,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태어나 1988년에 사망했기에 시대착오적인 발언들이 눈에 띈다. 

원자폭탄 개발자 중 한 명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거의 밝히지 않으며(그냥 아무 생각 없어 보인다.) 여성 과학자인 마리 퀴리를 과학자가 아닌 여성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자신이 그린 누드 그림의 제목을 '퀴리'라고 붙여서 사람들이 그림의 모델이 정말 '마리 퀴리' 였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물자를 부족한 국가와 나누어야 한다는 의견에 기술개발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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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승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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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거에 금지되었던 지식의 역사와 현재 금지되어야 하는지 논란이 되는 지식을 다룬다. 흥미롭게도 지식에 대한 금지를 통해 오히려 그런 지식의 발달이 촉진되었음을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지된 지식]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리말의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금지 중 하나인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간은 제한되고 짧은 시간만을 누릴 수 있으며, 이 상황이 바로 인간을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만든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에 따르면, 유기체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죽음이 늦게 등장하는 이유는 생명 형태의 유일무이성과 관련이 있고, 이 죽음은 유성생식을 하는 유기체에서만 발견된다.

초기 생명체들에게만 국한되었던 세포분열은 개별성이 없고, 그렇기에 죽음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가 획득한 금지된 지식은 실제로는 금지된 사랑을 가리켰다.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제시해 이런 대담한 통찰을 뒷받침한다. 

 

<2장 우리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코페르니쿠스, 다윈,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3장 비밀을 다루는 법>에서는 베버의 탈주술화와 계몽주의의 종말 그리고 연금술 같은 비밀스럽게 여겨졌던 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챕터는 3장이었는데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저자의 글로 읽으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은 1960년대보다 훨씬 영향력이 커졌지만, 1960년대는 거대한 미래 기획에 대한 더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는 침묵의 외투로 덮여 있는 주제를 다룬 많은 책들이 이런 미래에 대한 예측을 했었다. 용기 있고 과감한 시도였지만, 목표에 닿지는 못했다. 계몽의 특징이 특별히 이 실패를 설명해 줄 수 있다.

계몽의 근본 원칙은 인간이 먼저 세계에 대한 이성적인 질문을 던지면, 그다음 자기 자신의 지성으로 이 질문에 이성적인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답을 알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미래를 구성할 수 있고, 인류가 마침내 행복을 느끼고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갈 수 있게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이 계몽의 기획이었다.

계몽의 기획을 실행했던 이들은 낭만주의자들이 계몽의 기획에서 보고 느꼈던 것과 과학이 20세기에 경험해야 했던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즉, 이성이 제기한 질문과 이에 대한 이성적인 대답이 서로에게 방해가 되고 대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왜 현대보다 과거(1960년대)가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위대한 업적의 발견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로 오면서 왜 이런 낭만적인 성향이 옅어졌는지도.

 

<4장 성스러운 것을 엿본 죄>는 과학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만 봤을 때는 종교나 생명윤리 관련 주제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근대의 과학 기술로 인한 어둠, 원자폭탄,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용된 독가스 등이 다뤄진다.


철학의 금지목록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비합리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이성이라는 차가운 빛에서 완성되고 관찰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과학의 어두운 원천에 대해 알릴 필요가 있다.

또 불합리성을 악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악을 선호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성이다. 선을 위한 비합리성을, 즉 정신의 밤 측면과 전체에 대한 느낌을 인간 안에서 혹은 인간으로부터 활성화하는 일은 금지된 지식이 없는 온전한 자연과학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5장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라>에 와서야 생명과학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이 책의 목차는 시간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유전자 과학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부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논란이 되기 쉬운 유전자 과학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담겨 있어서 재밌었다.

 

<6장 과감하게 봉인을 떼다>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지식 또는 계몽을 금지하려고 했던 노력들이 제시된다. 물론 이런 노력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마지막 장인 <7장 지식사회의 사생활과 비밀>은 정보화 시대의 개인정보 보호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지식이나 기술이 일단 발견되면 흐름을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위에서 언급된 '선을 위한 비합리'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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