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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윌 곰퍼츠 지음, 주은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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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술가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어떻게 다를까? 폴 세잔은 클로드 모네가 가진 관점에 대해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다"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눈은 신이 내린 눈, 선택받은 눈일까? 그럼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예술가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저자는 어느 날 한 사람의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해변에서 보내는 사진의 메일을 한 통 받는다. 모래 놀이를 하느라 삼매경인 아이와 해변의 모래를 유심히 살피며 바닷물에 쓸려온 흥미로운 사물들을 발견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이 사진은 주변에 존재하지만 대체로 스쳐 지나가버린 일상 속 아름답고 경이로운 순간을 알아차리는 예술가의 시선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을 알아차린 예술가들이 승화시킨 예술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살면서 놓친 것들을 볼 수 있다. 


​예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보는 방식을 삶에 적용시킨다면 우리의 감각은 활성화된다. 저자는 "바스키아의 눈으로 뉴욕을 걷고, 엘 아누치의 손으로 병뚜껑을 줍는다"라고 표현했다. 


​단순한 감상을 넘어 그 속에 깃든 인생, 기쁨과 슬픔, 내면을 들여다보며 내 일상 속에 적용해 볼 때 삶은 더욱더 풍성해지고 무궁무진해진다. 이 책은 각 화가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동안 놓쳤던 어쩌면 아주 사소하고 어쩌면 아주 일상적이고 어쩌면 아주 고통스러운 흔적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시대를 아우르는 31명의 예술가,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을 가로지르는 예술가들을 한눈에 만나볼 수 있다. 작가가 현대미술을 다루는 테이트 갤러리 관장으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현대미술가에 대한 비중이 높기도 하고, 고전보다는 현대미술에 대한 시각이 예리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생각의 밀도가 높다. 


미술관에 간다고 해서 매번 인생 작품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아리송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예술가의 시선이 담겼는지를 다각도로 살펴보다 보면 그들이 쌓은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그 기쁨이 주는 감각적 환희는 삶을 더욱 풍요롭게 확장시킨다. 이것이 예술이 주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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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맨 만큼 내 땅이다
김상현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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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당신은 결국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의 저자이자 필름출판사의 대표, 카페 공명의 대표인 김상현 작가. 이미 전작의 에세이들과 홍대와 연남점의 카페 공명으로 많은 청춘들과 소통하고 50만 독자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작가의 신작 에세이다. 베스트셀러의 저자, 카페와 출판사 대표까지 다양한 일을 하면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창조하고, 연이은 성공으로 인해 공허함이 남아 있을 때 스스로를 어떻게 일으켰는지에 대한 마음을 다룬다. 


성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으나 남은 것은 마음의 허기와 공허였고,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배달음식을 선택한 저자는 103kg까지 살이 쪘다고 한다. 일과 성공에 진심으로 임했던 만큼 그 무게는 무거웠고 결국 일과 행복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과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성공이나 부, 명예 등 어딘가에 무작정 도착하고 싶은 이들에게 목적지가 단지 사회적 성공이 아닌, 헤매고 방황하는 모든 상황들이 다 하나의 길임을 결국엔 나의 땅이 되는 길임을 먼저 공허에 도착해 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문장들. 한겨울의 붕어빵 같은 책이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을 가지는 것, 행복과 야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 흔들리고 헤매는 인생 속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고민들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조합과 조화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조합'과 '조화'이다. 기존에 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내 안에서 조합하며 새롭게 엮어내는 과정이 중요하는 것과 모순된 것들 사이에서 조화롭게 균형을 잡으며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셀프 브랜딩에 관련된 이야기가 쏟아지는 현재, 저자는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나의 배경, 나의 경험이 곧 나의 브랜드가 된다고 말한다. 내가 보고 듣고 사랑하며 쌓아 올린 것의 총합이 나의 브랜드이기에 결국 정답은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조합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채우는 인풋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당장 꺼내 쓸 일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계속 채워 넣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언젠가 무의식의 창고에서 잠자던 것들이 새로운 자극을 만났을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 나의 좁은 세계를 조금이라도 넓혀줄 수 있는 것들로 신중하게 선택하여 채워지는 것들이 언젠가 나를 증명하는 고유한 아웃풋이 되어줄 것이라고. 


내면을 채우는 동시에 행동으로 나아가다 보면 내가 사랑한 것들이 결국 나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축적된 시간의 총합은 고유한 나를 만들어 줄 것이다. 


직렬적 경험


고유한 서사를 채워나가는 일에는 시간과 경험으로서의 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경험과 축적된 시간은 순차적으로 '직렬적'으로 쌓인다. 저자는 그것을 '직렬적 경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시간을 견뎌낸 인간이 살아남는다.


​이제는 정말 그런 사회가 되었다. 시간을 온전히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실패하고 고통스러운 과정, 지난하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과정의 경험은 결코 AI가 흉내 낼 수 없다. 이러한 시간들은 직렬적으로 쌓이고 쌓여 새로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층위를 가지게 한다.  


​저자는 경제적 자본으로 '시간'이라는 가장 희소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짜 경험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을 쌓아야 자신만의 고유하고 희소한 서사가 빛날 것이라고. 이것이 지속 가능한 일과 삶을 위한 커리어를 만드는 일이자, 자신만의 결을 만드는 방식이다. 


저자가 가진 삶의 태도는 잔잔하고 묵묵하다. 자기 계발을 치열하게 하거나 노력을 부단히 하여 따라오는 운을 거머쥐라는 태도가 아닌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평범하고 묵묵하게 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와 결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불확실한 시간 속에서 평범하게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지, 나만 도태되어 가는 것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자는 이미 경험 속에서 알고 있다. 빠르고 급하게 선택한 성장에서 얻은 것은 공허함이며 그것은 지속 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고민의 시간은 나만의 서사를 벼려내는 중이라는 믿음, 비록 지금은 길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실하게 쌓아 올린 삶의 자세는 나의 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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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명품 - 사람이 명품이 되어가는 가장 고귀한 길
임하연 지음 / 블레어하우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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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단단하고 우아한 내면의 디자인 코드를 제시함으로써, 명품을 걸치지 않아도 스스로가 명품이 되고 싶은 청춘들에게 보내는 인문학적인 자기계발서다.


명품이 된다는 말이 약간 피상적으로 들리지만, 재클린 케네디가 겪어온 인생과 삶의 태도를 살펴보면 인간 자체가 빛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금수저, 흙수저 수저계급론적인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훨씬 가치 있게끔 인도해 준다. 


​책의 구성은 독특하게도 가상의 인물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불평등한 수저계급론에 회의적이면서 동시에 빛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학생과 '상속자'의 만남과 대화로 구성되어 있어 타인의 대화를 옆에서 엿듣는 것 같은 독특한 편집이 인상적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상속자 정신'으로 재해석된 과거로부터 물려받는 힘, 문화적 자부심이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많은 장인들의 노력 속에서 축적된 가치가 오늘날 불안하고 흔들리는 청춘들에게 앞길을 안내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대화의 주체도 학생과 바로 이 '상속자'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저자는 질문하고 대답하고 사유한다. 



현재의 '올드머니룩'의 원조인 재클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아내다. 학창 시절부터 훌륭한 매너와 대화 기술을 교육받았고 엄격한 학문 또한 성실하게 수행해왔다. 


그러나 아일랜드계라는 이유로 성골과 진골이 나뉘던 미국 상류층 사회에서 늘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프랑스 혈통과 교양을 내세워, 결국 세상의 시선을 뒤집고 세기의 아이콘이 되었다. 교양과 품격으로 콧대 높은 프랑스조차 재클린에게는 예의 있게 대우했고, 많은 이들의 워너비가 되었다.


이 책은 재클린 케네디를 인간 명품의 모델 및 상징으로 삼아 그 매력을 풀어낸다. 고유함, 탁월함, 역사와 스토리, 심미안, 영향력이라는 다섯 가지 코드로 대입하여 명품으로 거듭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책의 핵심은 '상속자 정신'이다. 이는 부모로부터의 물질적 상속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로부터 물려받는 거대한 유산을 의미한다. "당신이 이타심을 두려워하는 것은 놀이를 통해 친구들과 문제를 해결하고 단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대화처럼, 이 책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지혜와 가치를 현재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원점'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통찰이다. 상속자는 "꿈은 습관이 아니라 뼈를 깎는 각오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서로의 구원"이라며, 진정한 새로운 미래는 계층을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계층에 상관없는 서로의 구원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경쟁이 아닌 연대로, 물질이 아닌 인격으로 승부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책은 '불변'의 렌즈로 운명을 바라보고, '변화'의 렌즈로 '상속'을 새롭게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인간은 삶을 창조할 수 있고, 새로운 미래도 열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것은 이미 희망을 숨겨받은 상속자"라는 문장은 우리 모두가 이미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금수저, 흙수저로 분류되는 시대 불평등과 불안 속에서 길을 잃은 청춘들에게 단순한 위로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설계도를 제시한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한 점 한 점의 노력이 쌓여 완성되는 '축적된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의 조건임을 이 책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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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마지막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생각지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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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칠레 출신 작가이자 외교관인 미구엘 세라노 저자의 젊은 시절에 노년의 헤세와 융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깨달음과 철학을 주고받는 내용이 세라노 시점으로 담겨 있다. 세라노가 보았던 헤세와 융의 모습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고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 혹은 편지 속에서 진중하고 철학적인 두 거장의 인생에 대한 영혼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은 1965년에 처음 세상에 선보인 후부터 꾸준히 인문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올해 박광자, 이미선 번역가님의 손을 거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인류 정신의 지형을 바꾼 두 사람, 헤르만 헤세와 구스타프 칼 융. 문학과 심리학의 두 거장이 저자 세라노와 나눈 대화와 편지 속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 우정,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과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헤세와 융은 이미 노년의 나이로 접어들어 많은 유명세를 뒤로 한 채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 세라노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가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눴고 두 사람은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헤세와 융이 직접 만났던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헤세가 융 박사에게 치료를 받고 그 유명한 <데미안>을 썼다는 내용은 유명하다. 두 사람은 세라노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전달받았고, 두 사람 모두 세라노를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지낸 사람처럼 기쁘게 맞이한다. 


"어떻게 이런 행운을 갖게 되었을까요?"

(중략)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여기 오신 손님들은 꼭 만나야 할 사람들뿐입니다. '비밀 클럽' 회원들이지요."

p.61



헤세와의 만남


저자는 헤세의 작품에 너무나도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저 수소문 끝에 헤세가 사는 곳을 무턱대고 찾아간다.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 시대니까 가능한 낭만이 아니었을지.


세라노가 헤세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6월로 당시 헤세는 74세, 세라노는 34세였다. 1961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헤세와의 만남과 그 이후 10년 동안 인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헤세와 끊임없이 편지를 왕래했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영특한 청년인 세라노를 헤세는 온화하게 맞아준다. 아들 혹은 손자뻘이 호기심이 왕성한 청년을 대하는 대화에서 결코 위계적이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헤세는 세라노를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처럼 하나의 원형으로, 심연에 내재하는 '자기'로 본 것이 아닐까.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자, 내면의 내재하는 것들을 일깨워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지.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분열된 원형을 세라노를 통해 보며 조금씩 '나 자신'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을까. 내면의 데미안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의 총 여정이라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데미안이었을 것이다. 


젊은 세라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찾는 내면의 진리들을 헤세에게 들려주고, 노쇠하여 이제 그만큼 확장된 세상을 보기 어려운 헤세는 젊은 청년에게 내면에서 찾는 평온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그런 상호보완적인 관계. 혹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서로 상반된 영혼이 만나 통합되는 과정이 아니었을지. 우연이지만, 우연한 만남이 아닌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에는 서로를 향한 존중과 우정 너머의 힘이 느껴진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나름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책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딱 맞는 순간에 독자에게 나타난다. 그렇게 생명 있는 원료로 만들어진 책은 저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빛을 발한다.

p.21


융과의 만남


융 박사와의 만남은 1959년 2월이었다. 융은 당시 83세, 세라노는 32살이었다. 융에게서 비범함을 느낀 세라노는 심리학과 인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융과의 만남은 헤세와의 만남과 또 느낌이 다르다. 융은 자신이 평생을 쌓아 올린 심리학, 연구한 신화와 상징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탄하듯이 말한다. 융은 심리학은 상당히 까다롭고 상징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도 지금도 많은 이들이 곡해하거나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아마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오해하지 않았을까. 그런 가운데 세라노는 인도에서 얻은 깨달음과 철학을 융 박사에게 이야기하고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융은 자신이 가진 이론을 바탕으로 세라노에게 설명해 주며 이끌어준다. 


헤세가 오랜 친구처럼 세라노와의 관계를 이어갔다면, 융 박사는 세라노에게 하나의 이정표이자 길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융이 제시하는 심리학은 무의식과 그림자, 꿈을 분석하면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개인성을 발견하는 것을 중시 여긴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만 하고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본래의 자신이어야만 하고 자신만의 개체성, 즉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한가운데에 있는 개인성의 중심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p.188


헤세와 융,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고 내면과 외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시키며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삶의 목적지로 여겼다. 


두 사람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분열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통합된 원형을 찾아서 헤세는 데미안과 싯다르타라는 문학을 통해 이야기했고 융은 많은 저서와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 후 인생이 무의미할 때 데미안을 읽고 살아갈 힘을 냈고, 헤세 이외에도 그 유명한 화가 잭슨 폴록 또한 융 박사의 치료를 받고 자신만의 예술을 찾았다. 무수히 분열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아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찾아갔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식, 영혼의 지도를 자신만의 언어로 펼친 두 거장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비밀 클럽'의 회원이 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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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 꾸준히, 천천히, 묵묵히 삶을 키우는 나무의 지혜
리즈 마빈 지음, 애니 데이비드슨 그림, 박은진 옮김 / 아멜리에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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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59종 나무들의 지혜를 담은 글로 모든 페이지마다 푸르름이 가득한 나무 일러스트가 담겨 있는 싱그러운 책, 아마존과 굿리즈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나무 철학서'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전에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이 읽던 책, 고다 아야의 <나무>라는 책을 통해 나무들도 사람 인생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음을 본 적이 있어 인상 깊었다. 나무에게도 인생의 이력이 있고 그 쌓아 올린 시간들이 차곡차곡 모여 나이테와 뿌리를 이루는 것들을 보면서 나무에게서 배우는 인생의 태도를 관조할 수 있었다. 


​고다 아야의 <나무>는 저자가 직접 죽은 나무를 베어 보기도 하고 산에 나무를 찾아가는 과정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50가지가 넘는 다양한 나무의 간단한 특징들과 더불어 거기서 오는 지혜를 일러스트와 함께 전달한다.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책에서 많이 만나볼 수 있는데 막연하게 나무처럼 든든하고 탄탄한 사람이라고만 생각되는데 이처럼 다양한 나무를 보니 다양한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범위가 너무 넓다. 그러니 이제는 심재가 단단하고 견고한 혹호두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려 4억 년 가까이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나무들, 변화에 적응하고 풍파를 견디며 살아남는 방식을 가장 잘 아는 나무들. 

가장 이끌리는 나무 먼저 읽어보아도 좋고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찾아보아도 좋다. 어디를 펼쳐도 꾸준하고 천천히 묵묵하게 자신의 삶을 키워낸 나무들이 존재하니.


이제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되고 싶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나무보다는 화려한 꽃들을 더 좋아했다. 활짝 개화하여 수려하게 자신을 펼쳐놓을 수 있는 꽃을 꿈꿨다. 다른 이들의 눈에도 꽃같이 보이길 원했다. 


은유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나는 꽃에 집착했다. 꽃무늬 옷, 꽃무늬 가방, 꽃무늬 액세서리로도 모자라서 새벽 꽃 시장에 가서 감당하지 못할 꽃들을 사 왔다. 나무야 뭐, 그냥 길거리에 있던 애들이고. 


눈에 띄어야 했고 열매를 맺어야 했고 화려한 나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세상 사는 것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화려하게 살아지던가 개화에 집착하다 보니 나는 나를 잃어버린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만 휩쓸리고 더더욱 나라는 사람을 꽃처럼 보이기 위해서 괜한 가시만 돋았고 내면을 돌보지 않았던 날들이 많았다. 


꽃이 아니라 이제는 나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꿈꾼다. 수천 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기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리고 물을 길어 마시는 나무들, 단 한 번의 박수갈채가 없어도, 어떤 일이 닥쳐도 순응하고 사는 나무들처럼. 묵묵히 감내하고 적응하는 소리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추위와 더위에 따라 잎사귀의 모양은 변하겠지만 차곡차곡 세월의 흐름을 쌓는 나무가 되고 싶다.


수천 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기 자리에 단단히 뿌리 내리며 강인하게 자라왔을 뿐이다. 단 한 번도 박수갈채를 바란 적 없이. 

p.22


부러지지 않고 유연하게


생존을 위해 나무들은 꼿꼿하게 버티지 않는다. 햇빛의 양에 따라 빛을 흡수하는 세포의 수를 줄이거나 늘리며 섬세하게 조율하고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줄기와 뿌리를 더욱 굶고 튼튼하게 키워 스스로 균형을 맞춘다. 


​강풍이 불면 몸을 낮추고 유연하게 적응하며 때가 되면 밑동에서 스스로 새순을 힘차게 밀어 올린다. 혹시 손상된 부분이 있다면 건강한 부분까지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상처 난 자리를 감싸고 상처를 딛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강하다는 증거라는 말이 나무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세찬 풍랑이 올 때 단단하게 꼿꼿이 서서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휘어지고 조금 부러져도 상처를 동여매고 견뎌내는 자세, 4억 년을 살아남은 자연이 몸소 보여주는 지혜다. 


​마음도 그저 꼿꼿하게 버티다간 언젠가 부러질 수도 있다. 바람이 오면 잠시 몸을 낮추고 스스로를 정비할 시간을 가지는 유연함이 있어야 하는데 항상 나는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서 이리저리 부러진 것 같다. 뭐가 그리 급해서 이기지도 못할 풍파를 맞고 부러졌냐는 듯 나무들은 우아한 몸짓으로 유연하게 자신을 보호한다. 그 몸짓을 닮아가고 싶다.  


'강인하지만 유연하게.'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개암나무가 온몸으로 실천해온 삶의 철학이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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