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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것들의 밤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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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부커상〉 〈로커스상〉 〈어슐러 K. 르 귄상〉 최종 후보로 올랐던 《저주 토끼》의 정보라 작가가 선보이는 디스토피아 SF 소설로  『밤이 오면 우리는』과 『현대문학』 2024년 12월호, 2026년 3월호에 수록된 두 편의 중편소설을 엮은 연작소설집이다.​


기계에 의해 지배당한 미래 세계에서 사투하는 흡혈인, 인조인간, 인간, 로봇 등의 다양한 존재가 등장하는 소설로 도구화된 여성, 사회의 폭력적인 규범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수자들, 존재하지만 이름도 형태도 없는 귀신같이 자신의 자리에 설 수 없는 소외된 자들이 함께 하는 미래는 희망적일 수 있는가를 묻는다. ​


어느 날 너무 발전한 AI가 인류 자체가 이 지구에 해롭다고 판단하여 인류를 말살해 버리기로 결심했다는 괴담의 이야기처럼 출발한 섬찟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조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할 현실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밤이 오면 우리는>은 연작의 세계관을 가장 먼저 잘 설명해 준다. 인간은 핵무기(인공태양)를 발명하고 그것을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안전장치를 마련하는데 문제는 이 기계가 판단하기에 인간이 지구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므로 인간을 말살하기 시작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폭발적으로 나오면서 제기된 괴담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된 배경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기계가 인간을 멸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생존에 위협이 되고 무서워야 해야 할 존재가 되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안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밀고하고 잡아 죽이는 인간 사냥꾼들이 생겨난다. 인간이길 포기한 존재, 탈인간적인 존재. 


또한 독특한 인간도 기계도 아닌 존재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1인칭 화자 '나', 흡혈귀다. 이게 상당히 소설에서 독특한 설정이다. 그러니까 사람 죽여 기계, 인간 사냥꾼 vs. 멸망당하는 인류 vs. 흡혈귀(?) + 나 로봇 아니에요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까지 이런 구도가 되는 것. 디스포티아 SF소설에 흡혈귀의 등장이라.. 그러니까 인간도 아닌 기계도 아닌 제3의 괴물 같은 존재, 한때는 인간이었기에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조건을 알고는 있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 생뚱맞지만 흡혈귀라는 비인간적인 존재가 탄생함으로써 이들은 정확하게 인간의 조건과 기준을 알고 있다. 


흡혈귀들은 인간의 피 냄새를 맡고 인간을 사냥해 피를 마신다. 그 앞에 나타난 것은 인조인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공 피, 인공물로 채워져 있어 인간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생긴 것이 너무 흡사해 인간인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앙 하고 물었다가 토악질만 하게 된 기계들이 인공태양을 가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탈출한 인조인간 '빌리'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독 소설에는 인간의 체취, 냄새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피는 흡혈귀의 관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등장하며 기계에는 흐를 수 없는 인간의 조건 '피'에 대해 이야기한다. 쫓기는 인간은 기계의 감시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은신하는 지하 하수구 같은 곳을 지나다니게 되고 생존이 걸린 삶에서 청결하게 다닐 수 없기에 체취, 악취, 인간의 냄새가 난다. 이를 더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인간의 그 냄새를 맡고 존재와 부재를 알아차린다. 냄새란 참을 수 없는 악취일지라도 기계, 흡혈귀, 인조인간에게는 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울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울 수 없는 흡혈귀에게 인간의 조건이란 상황에 맞는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눈물, 피, 땀, 오물 등. 


​그러나 이 냄새와 액체를 가진 인간의 조건을 충족하는 인간일지라도 인간이길 포기한 탈인간, 사냥당할까 두려워하는 흡혈귀, 눈물까지 흘리며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인조인간까지 인간 - 비인간 - 탈인간의 경계는 흐릿하다.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인간인가? 인간의 조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을 돕기 위한 인조는 그렇다면 매몰차게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가? 한때 사람이었던 존재는 이제 그저 괴물인가? 


미친 여자, 귀신, 우는 로봇, 이름 없는 것들


중간의 <예언자>는 1부의 프리퀄의 이야기로 학교에서 학생들의 교육을 통제하고 인간의 노동을 제한하며 여성들은 출산에 무자비하게 이용당하는 세계를 그린다. 

​마지막 3부 <우리는 모두 악마에게서 왔다>는 1부와 연결되는 이야기로 인조인간과 흡혈귀인 '나'가 관리 본부를 들어간다. 


1, 2, 3부에는 이름 없는 것들 즉,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없거나 혐오나 차별의 대상이 되는 자신의 자리가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흡혈귀가 어떻게 갑자기 탄생했는가에서는 '화장실의 미친 여자'라 불리는 화장실에 숨어서 남성들만 잔인하게 살해하는 여자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뒤에 작가의 말과 해설에도 나오는데 역시나 '다락방에 미친 여자' 수전 구바의 페미니스트 문학 이론서의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분노와 광기가 투영된 통제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혐오, 비인간적인 존재 흡혈귀의 탄생은 이렇게 연결된다. 


혐오의 존재 '화장실에 미친 여자'에서 탄생한 통제 가능하지 않은 인간도 기계도 아닌 비인간의 존재 흡혈귀는 '장애를 지닌' 인간으로도 볼 수 있다. 울기까지 하면서 저 로봇 아니고 사람인데요라고 주장하는 인조인간은 퀴어로 연결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등장하는 이름 없는 것들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시선으로 해석하고 연결해 볼 수 있다. 시스템을 교란시켜서 오류를 만들어 내는 귀신같은 존재들. 3부에서는 이런 비인간적인 귀신같은 존재들이 모여 폭력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 사투한다. 


시작은 분명 기계 vs 인간의 구도였으나 그 안에서 폭력과 차별로 점차 분열되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소설은 물으며 현재를 비춘다.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이름 없는 귀신같은 차별 받고 소외받는 비인간으로 취급되는 이들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어떻게 그것을 규정할 것인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되는 세계는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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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잠 - 덕자전성시대 덕자의 장편소설
박보미(덕자전성시대) 지음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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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그루잠'은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드는 짧은 잠’을 뜻하는 말이다. 밤중에 잠시 깼다가 다시 잠드는 상황이나, 낮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시 잠드는 경우를 설명할 때 쓸 수 있다. 소설의 제목이자 메타포인 그루잠은 중간중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루잠》은 유튜브 '덕자전성시대'의 콘텐츠 크리에이터 박보미 저자가 쓴 소설로, 끝내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선함은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로 삶에서 받은 상처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자 위로인 자전적인 소설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 대신 살아있다는 죄책감으로 생애를 시작한 주인공 윤설, 그의 주변에는 그 누구도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 사기꾼, 직장 내 괴롭힘,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와의 절연 등.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 삶에서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배신당하고 호구처럼 이용당하며 삶이 짓밟히고 유린당한다.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설의 모습에서 답답함도 느껴지지만 결국 끝끝내 선의를 가지고 순수함을 유지하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단단하고 다시 일어서는 의지가 보인다. 


유튜브 방송에서 사람은 태어난 이상 그 존재에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박보미 저자의 목소리가 이 소설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짧은 비현실적인 공간에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니까 설의 인생과 더불어 사후세계일지 환상의 세계일지 그저 설의 꿈일지도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진행된다. 책의 제목이 그루잠인 것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잠시 잠든 사이의 꿈을 꾸는 구성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현실과는 다른 가치가 작동하는 세계, 이 세계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누가 설을 기억해 주고 있는지를 따라가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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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 믿었던 지배 - 병리적 인간이 당신을 선택하고 놓아주지 않는 이유
네이딘 매컬루소 지음, 문가람 옮김 / 생각지도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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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중 영화는 조단 벨포트라는 희대의 증권 조작 사기꾼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작중 마고 로비가 맡았던 첫 번째 부인 '네이딘 매컬루소' 또한 실존 인물이다. 


​네이딘은 스물두 살에 조단과 결혼해 남편의 학대와 약물 중독으로 지옥을 겪어야 했고, 이혼 후 전문 심리치료사의 길을 걸으며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지난 10여 년간 가정폭력(신체적인 폭력을 포함하여 심리적 폭력까지) 및 가스라이팅 등 병리적 파트너에게 고통받은 여성들을 상담해 왔다. 


《사랑이라 믿었던 지배》는 네이딘이 직접 겪었던 학대와 고통을 바탕으로 친밀한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 지배, 학대, 통제 등의 메커니즘과 심리적 이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 등을 '트라우마 유대'라는 개념을 통해 소개한다. 


저자인 네이딘 박사가 이야기하는 트라우마 유대, 복합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DSM-5에는 명시되지 않았기에 2010년대 초반까지도 심리학계에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연구되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주로 쉽게 사용하거나 미디어에서 내뱉는 가스라이팅,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은 사실상  DSM-5에 명명되지 않은 회색 지대에 속한다. 앞으로도 많은 부분에서 폭력적이거나 타인의 내면에 상처를 입히는 정신질환이 등장할 것이고 이를 일일이 다 명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여전히 비슷한 양상으로 고통받고 침묵하거나 마땅한 용어가 없어 증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저자가 자신도 직접 겪어본 이 '트라우마 유대'는 무엇일까? 폭력이 스며든 애착 관계, 사랑이라는 감정 안에 종속되어 버리는 잔혹한 역설을 말한다. 분명 시작부터 그렇게 뒤틀린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 폭력, 학대로 인해 상대를 떠나지도 못하고 상처로 인한 불안, 우울, 수치심 등을 홀로 떠안는 관계를 트라우마 유대라고 한다. 


가해자가 정교하게 놓은 덫에 걸려 사냥 당한 피해자는 이미 세뇌, 정서적 통제 및 의존 상태가 되어 떠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가해자의 간헐적 보상, 간헐적 강화는 배신과 사랑을 번갈아 가면서 반복하는 패턴으로 이렇게 간헐적으로 보상을 받은 뇌는 금세 중독되고 종속되어 망가진다. 트라우마 유대는 사실상 중독이나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학대 속에서 '내가 잘 할게'라는 달콤한 말과 돌봄, 친절은 피해자에게 이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관계에 중독되어 버린다. 이를 스스로의 의지로 끊는 것은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는 중독자, 알코올 의존증을 의지로 이겨내는 것과도 비슷한 일일 것이다. 


책에는 트라우마 유대의 경고 신호 자기 진단 리스트가 있다. 내가 만약 트라우마 유대 관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테스트를 해보길, 15개의 질문 중에 8개가 '예'라면, 이는 트라우마 유대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미 이 유대에 갇혀 괴로운 사람은 테스트하기 전에 스스로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트라우마 유대'라는 단어로 자신의 상황을 명확하게 명명하고 이해할 때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냥당한 이들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상대방이 왜 그러는지를 알았으니 즉, 적을 알았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알고 이겨내야 한다. 가해자에게 사냥을 당했다고 해서 바보가 아니며, 트라우마 유대라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무력하게 되는지 그 원리를 설명했다. 나아가, 광기의 회전목마에서 내리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덫에 걸린 피해자들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쉽지 않을 일일 것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용감하게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을 '능동적 생존자'라고 표현한다. 



이 능동적 생존자들은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게 되며, 삶의 태도를 다시 세우고 삶의 기준 또한 명확해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수치심을 유발하게 하는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구분하고 그 지옥 같은 경험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찾게 된다. 


트라우마 유대, 복합 PTSD에 대한 실체에 대해 알고 싶다면 혹은 내가 지금 트라우마 유대의 덫에 갇혀 있는 것 같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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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수첩
고다 아야 지음, 황국영 옮김 / 책사람집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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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이 머리맡에 항상 두고 읽던 책인 《나무》의 저자, 고다 아야의 계절에 대한 에세이다. 고다 아야가 타계한 후, 딸인 작가 아이코 다마가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모아 출간한 책으로 "삶의 감각과 태도를 전하는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 《나무》에서도 섬세한 감성과 관찰로 13년간에 걸친 나무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했기에 이번 계절에 대한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사계절이 지나가며 느끼는 찰나의 감정, 계절과 계절 사이의 그 헛헛하고 덧없는 동시에 다음 계절에 대한 기대감까지 섬세하게 기록된 에세이에서는 짙은 계절의 냄새가 느껴진다. 봄의 흔들리는 꽃 냄새, 여름의 비가 내린 후의 흙냄새, 가을의 떨어지는 낙엽 냄새, 겨울의 차가운 공기 냄새. 찰나의 순간 사라지는 모든 감각들이 선명하게 표현된 글들에서 계절을 기다리고 살아낸 삶에 대한 쓸쓸함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다시 다음 계절을 기다는 마음을 품은 이가 가진 내일의 희망, 삶의 근사함, 감사함이 몽글몽글 떠오른 책이다. 이 역시 영화 <퍼펙트 데이즈>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책, 반복된 계절 속, 하루하루 속에서 성실히 작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봄날과 아버지


작가와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은 이전에 《나무》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경쟁하듯 서로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식물 이름을 줄줄 외던 언니마저 어머니가 돌아가신 2년 후 잃었다. 남동생마저 저자가 스물두 살 때 먼저 하늘로 가버렸다. 작가에게 남은 가족이란 아버지뿐이었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그리움, 설움과 정념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평생을 연구하고 직접 만지며 겪은 모든 식물, 글쓰기 또한 작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 지혜와 지식을 습득했다. 저자의 모든 삶의 원형에는 분명 아버지가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장 맨 처음 에피소드부터 봄날의 정취가 묻어나는 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봄은 힘든 계절이다. 모든 생명이 소생하고 겨우내 찬 바람과 겨울의 혹독한 흔적을 녹이는 따스한 햇살과 기온이 찬찬히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봄이 되면 이유 없는 쓸쓸함에 잠긴다. 이 쓸쓸함이란 가을에 느끼는 쓸쓸함과는 또 다른 층위의 감정인데,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우수, 마음에 엷은 그늘이 드리우는 것은 금세 떠나버릴 시간들에 대한 쓸쓸함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기엔 적절한 슬픔의 계절이다. 사랑과 애착을 주고받던 대상이 꽃처럼 흐트러지며 봄이라는 기억을 남기고 떠나갔지만, 보낸 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므로 그저 바라보고 머무를 수밖에 없는 덧없음. 


​저자의 아버지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사랑했던 식물과 동물에게 점점 거리를 둔다. 봄이 성큼 다가와도, 피어나는 꽃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는 이제는 모든 것을 보내주고 돌아가야 하는 흙을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생성의 결과인 꽃과 열매를 사랑하고, 지난날을 뒤로하는 노년에는 가장 고요하고 원숙한 흙을 사랑한다.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각자가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 다르듯 나의 지난봄 안에서 사랑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내년에 또 봐!


​줄기처럼 이어져 뻗어나가는 추억, 모래알처럼 작게 떠오르는 추억, 가냘프고 희미하지만 이어져 나가는 추억, 떨어진 낙엽처럼 이제는 부재하지만 현존했던 생명력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계절, 가을.

​"내년에 또 봐! 희망 사항인지 부탁인지 모를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외침에서 왠지 모를 망연함과 애착이 느껴진다. 마치 '잘 가, 마지막까지 잘 살아내줘서 고마웠어'라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늘 훌륭한 마무리를 짓는 단풍의 모습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을 때 도저히 마무리를 잘 해왔다고 할 수 없는 범람의 연속을 그때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보다는 이제 와서 소망한들 무리일 것이니 그저 단풍을 동경한다는 저자의 말은 살아온 날들을 위무한다. 그렇지, 모든 일에서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면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겠지. 그저 훌륭한 마무리로 떨어지는 낙엽을 기쁘게 바라보는 것이 가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그리고 내년에 또 봐!라는 말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계절이기에 올해는 조금 덜 몸살을 앓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저자는 영차영차 젊었을 때 애를 쓰고 살아온 자신을 다독인다. 나이가 들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 자책보다는 그땐 영차영차 애를 쓰며 부단히 살아왔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내가 나를 봐주는 것. 


꽃과 나무의 상생, 근사한 여름날의 밤과 훈풍, 단풍의 끄트머리, 서리가 낀 겨울날의 새벽의 냄새까지 사계절을 감각한다는 것이 삶을 얼마나 깊이 감각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 읽는 동안 나의 계절과 기억이 소환되고 지나가는 이 계절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계절의 감각과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선물하기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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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와 거짓말의 계절 도서위원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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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상 수상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이자, 도서위원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인 《책갈피와 거짓말의 계절》. 전작은 읽지 않았지만, 제법 캐릭터가 명확하게 잡혀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일본 미스테리 소설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콤비의 원형에 가깝다. 다시 만난 호리카와와 마쓰쿠라 콤비는 도서실을 무대로 투구꽃이라는 맹독을 지닌 꽃 책갈피를 우연하게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전작에서는 두 사람이 약간 대면대면하게 결말이 났다고 하는데 다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뭉치는 두 사람에게 지난 어색함은 잘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밀한 사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건을 파헤치는 내내 묘한 긴장감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분명 숨기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이것이 두 사람이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아낸 문제의 투구꽃 책갈피. 투구꽃은 맹독으로 많은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살인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투구꽃을 활용하여 보험금을 노리고 저지른 범죄 사례도 있을 정도. 때마침 학생들 사이에서 악명 높던 교사가 투구꽃 중독 증세로 쓰러지고, 교정 뒤편 화단에서 독초가 재배되고 있었다는 불온한 사실까지 드러난다. 여기에 본심을 감춘 채 그 책갈피가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수수께끼의 여학생 '세노'가 합류하며 주인공들은 사건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일까


소설은 이 맹독을 둘러싼 치열한 두뇌 싸움이 아니라, 그 이면에 얽힌 인물들의 '거짓말'을 파헤치는 과정을 조망한다. 투구꽃을 처분하려다 들키자 종이봉투가 없어서 일단 땅에 묻어 숨겼다며 서툰 변명을 늘어놓는 세노, 그리고 누군가가 과거에 만든 책갈피를 복제해서 뿌리고 있다는 자조 섞인 진실까지, 십대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본심을 겹겹이 감춘다.

책을 반납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으면서도 못 봤다고 거짓말을 했던 나(호리카와), 그리고 다른 식물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오직 투구꽃만 단번에 알아보았던 마쓰쿠라의 비밀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호리카와의 대립은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누구나 조금씩 거짓말을 하니까, 거짓말이 한 방울 섞여 있다고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된다"는 나(호리카와)의 독백은 꽤나 씁쓸하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합리화인가, 아니면 그저 해석과 각자의 입장의 차이일 뿐인가. 확실한 것은 세 명의 인물 모두 자신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는 거짓과 진실을 섞어버린다는 점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하는 거짓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방어적인 거짓말인가 아니면 다른 이를 공격함으로써 혼란 뒤에 숨어버리는 거짓말인가. 소설은 계속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를 알아가고자 한다.


마지막 수단


왜 이 책갈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세노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갈피의 복제본을 가진 또다른 인물 역시 같은 말을 한다. 이것은 마지막 수단이라고. 본래는 치명적인 살인 도구이지만, 궁지에 몰린 십대들에게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지탱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이 위험한 물건이 하필이면 벽돌책 고전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사이에 끼워져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설정 또한 묘하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맹독을 품고, 누군가는 거짓말로 무장하며, 또 누군가는 기꺼이 비밀을 끌어안는다. 사건의 진상이 모두 밝혀진 뒤에도 통쾌함보다는 씁쓸함이 남는다. 그렇게까지 말 그대로 독을 품어야 하는 삶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각자의 절박함을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민낯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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