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마지막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생각지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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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칠레 출신 작가이자 외교관인 미구엘 세라노 저자의 젊은 시절에 노년의 헤세와 융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깨달음과 철학을 주고받는 내용이 세라노 시점으로 담겨 있다. 세라노가 보았던 헤세와 융의 모습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고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 혹은 편지 속에서 진중하고 철학적인 두 거장의 인생에 대한 영혼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은 1965년에 처음 세상에 선보인 후부터 꾸준히 인문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올해 박광자, 이미선 번역가님의 손을 거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인류 정신의 지형을 바꾼 두 사람, 헤르만 헤세와 구스타프 칼 융. 문학과 심리학의 두 거장이 저자 세라노와 나눈 대화와 편지 속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 우정,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과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헤세와 융은 이미 노년의 나이로 접어들어 많은 유명세를 뒤로 한 채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 세라노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가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눴고 두 사람은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헤세와 융이 직접 만났던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헤세가 융 박사에게 치료를 받고 그 유명한 <데미안>을 썼다는 내용은 유명하다. 두 사람은 세라노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전달받았고, 두 사람 모두 세라노를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지낸 사람처럼 기쁘게 맞이한다. 


"어떻게 이런 행운을 갖게 되었을까요?"

(중략)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여기 오신 손님들은 꼭 만나야 할 사람들뿐입니다. '비밀 클럽' 회원들이지요."

p.61



헤세와의 만남


저자는 헤세의 작품에 너무나도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저 수소문 끝에 헤세가 사는 곳을 무턱대고 찾아간다.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 시대니까 가능한 낭만이 아니었을지.


세라노가 헤세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6월로 당시 헤세는 74세, 세라노는 34세였다. 1961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헤세와의 만남과 그 이후 10년 동안 인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헤세와 끊임없이 편지를 왕래했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영특한 청년인 세라노를 헤세는 온화하게 맞아준다. 아들 혹은 손자뻘이 호기심이 왕성한 청년을 대하는 대화에서 결코 위계적이거나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헤세는 세라노를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처럼 하나의 원형으로, 심연에 내재하는 '자기'로 본 것이 아닐까.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자, 내면의 내재하는 것들을 일깨워 주는 자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지.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분열된 원형을 세라노를 통해 보며 조금씩 '나 자신'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을까. 내면의 데미안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의 총 여정이라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데미안이었을 것이다. 


젊은 세라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찾는 내면의 진리들을 헤세에게 들려주고, 노쇠하여 이제 그만큼 확장된 세상을 보기 어려운 헤세는 젊은 청년에게 내면에서 찾는 평온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그런 상호보완적인 관계. 혹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서로 상반된 영혼이 만나 통합되는 과정이 아니었을지. 우연이지만, 우연한 만남이 아닌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에는 서로를 향한 존중과 우정 너머의 힘이 느껴진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나름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책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딱 맞는 순간에 독자에게 나타난다. 그렇게 생명 있는 원료로 만들어진 책은 저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빛을 발한다.

p.21


융과의 만남


융 박사와의 만남은 1959년 2월이었다. 융은 당시 83세, 세라노는 32살이었다. 융에게서 비범함을 느낀 세라노는 심리학과 인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융과의 만남은 헤세와의 만남과 또 느낌이 다르다. 융은 자신이 평생을 쌓아 올린 심리학, 연구한 신화와 상징 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탄하듯이 말한다. 융은 심리학은 상당히 까다롭고 상징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도 지금도 많은 이들이 곡해하거나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아마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오해하지 않았을까. 그런 가운데 세라노는 인도에서 얻은 깨달음과 철학을 융 박사에게 이야기하고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융은 자신이 가진 이론을 바탕으로 세라노에게 설명해 주며 이끌어준다. 


헤세가 오랜 친구처럼 세라노와의 관계를 이어갔다면, 융 박사는 세라노에게 하나의 이정표이자 길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융이 제시하는 심리학은 무의식과 그림자, 꿈을 분석하면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개인성을 발견하는 것을 중시 여긴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만 하고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본래의 자신이어야만 하고 자신만의 개체성, 즉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한가운데에 있는 개인성의 중심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p.188


헤세와 융, 두 사람 모두 자기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고 내면과 외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시키며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삶의 목적지로 여겼다. 


두 사람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분열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통합된 원형을 찾아서 헤세는 데미안과 싯다르타라는 문학을 통해 이야기했고 융은 많은 저서와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 후 인생이 무의미할 때 데미안을 읽고 살아갈 힘을 냈고, 헤세 이외에도 그 유명한 화가 잭슨 폴록 또한 융 박사의 치료를 받고 자신만의 예술을 찾았다. 무수히 분열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아 온전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찾아갔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식, 영혼의 지도를 자신만의 언어로 펼친 두 거장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비밀 클럽'의 회원이 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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