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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수첩
고다 아야 지음, 황국영 옮김 / 책사람집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이 머리맡에 항상 두고 읽던 책인 《나무》의 저자, 고다 아야의 계절에 대한 에세이다. 고다 아야가 타계한 후, 딸인 작가 아이코 다마가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모아 출간한 책으로 "삶의 감각과 태도를 전하는 책"으로 알려졌다. 이전 《나무》에서도 섬세한 감성과 관찰로 13년간에 걸친 나무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했기에 이번 계절에 대한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사계절이 지나가며 느끼는 찰나의 감정, 계절과 계절 사이의 그 헛헛하고 덧없는 동시에 다음 계절에 대한 기대감까지 섬세하게 기록된 에세이에서는 짙은 계절의 냄새가 느껴진다. 봄의 흔들리는 꽃 냄새, 여름의 비가 내린 후의 흙냄새, 가을의 떨어지는 낙엽 냄새, 겨울의 차가운 공기 냄새. 찰나의 순간 사라지는 모든 감각들이 선명하게 표현된 글들에서 계절을 기다리고 살아낸 삶에 대한 쓸쓸함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다시 다음 계절을 기다는 마음을 품은 이가 가진 내일의 희망, 삶의 근사함, 감사함이 몽글몽글 떠오른 책이다. 이 역시 영화 <퍼펙트 데이즈>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책, 반복된 계절 속, 하루하루 속에서 성실히 작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봄날과 아버지
작가와 아버지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은 이전에 《나무》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경쟁하듯 서로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식물 이름을 줄줄 외던 언니마저 어머니가 돌아가신 2년 후 잃었다. 남동생마저 저자가 스물두 살 때 먼저 하늘로 가버렸다. 작가에게 남은 가족이란 아버지뿐이었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 그리움, 설움과 정념은 더욱 깊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평생을 연구하고 직접 만지며 겪은 모든 식물, 글쓰기 또한 작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 지혜와 지식을 습득했다. 저자의 모든 삶의 원형에는 분명 아버지가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장 맨 처음 에피소드부터 봄날의 정취가 묻어나는 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봄은 힘든 계절이다. 모든 생명이 소생하고 겨우내 찬 바람과 겨울의 혹독한 흔적을 녹이는 따스한 햇살과 기온이 찬찬히 들어오기 시작하지만 봄이 되면 이유 없는 쓸쓸함에 잠긴다. 이 쓸쓸함이란 가을에 느끼는 쓸쓸함과는 또 다른 층위의 감정인데,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우수, 마음에 엷은 그늘이 드리우는 것은 금세 떠나버릴 시간들에 대한 쓸쓸함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기엔 적절한 슬픔의 계절이다. 사랑과 애착을 주고받던 대상이 꽃처럼 흐트러지며 봄이라는 기억을 남기고 떠나갔지만, 보낸 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므로 그저 바라보고 머무를 수밖에 없는 덧없음.
저자의 아버지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사랑했던 식물과 동물에게 점점 거리를 둔다. 봄이 성큼 다가와도, 피어나는 꽃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는 이제는 모든 것을 보내주고 돌아가야 하는 흙을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생성의 결과인 꽃과 열매를 사랑하고, 지난날을 뒤로하는 노년에는 가장 고요하고 원숙한 흙을 사랑한다.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각자가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 다르듯 나의 지난봄 안에서 사랑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내년에 또 봐!
줄기처럼 이어져 뻗어나가는 추억, 모래알처럼 작게 떠오르는 추억, 가냘프고 희미하지만 이어져 나가는 추억, 떨어진 낙엽처럼 이제는 부재하지만 현존했던 생명력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계절, 가을.
"내년에 또 봐! 희망 사항인지 부탁인지 모를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외침에서 왠지 모를 망연함과 애착이 느껴진다. 마치 '잘 가, 마지막까지 잘 살아내줘서 고마웠어'라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늘 훌륭한 마무리를 짓는 단풍의 모습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봤을 때 도저히 마무리를 잘 해왔다고 할 수 없는 범람의 연속을 그때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보다는 이제 와서 소망한들 무리일 것이니 그저 단풍을 동경한다는 저자의 말은 살아온 날들을 위무한다. 그렇지, 모든 일에서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면 그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겠지. 그저 훌륭한 마무리로 떨어지는 낙엽을 기쁘게 바라보는 것이 가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그리고 내년에 또 봐!라는 말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계절이기에 올해는 조금 덜 몸살을 앓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저자는 영차영차 젊었을 때 애를 쓰고 살아온 자신을 다독인다. 나이가 들며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지나간 날들에 대한 후회, 자책보다는 그땐 영차영차 애를 쓰며 부단히 살아왔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내가 나를 봐주는 것.
꽃과 나무의 상생, 근사한 여름날의 밤과 훈풍, 단풍의 끄트머리, 서리가 낀 겨울날의 새벽의 냄새까지 사계절을 감각한다는 것이 삶을 얼마나 깊이 감각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책. 읽는 동안 나의 계절과 기억이 소환되고 지나가는 이 계절을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계절의 감각과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선물하기도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