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귀 -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7년의 여정
버나뎃 머피 지음, 박찬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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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뎃 머피는 프로방스에 30년을 거주한 영국인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작가는 당연히 프로방스의 아를에서 정점에 올랐던 붉은 머리의 네덜란드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불멸의 작품을 남기고 요절한 예술가의 불꽃같은 삶이라. 얼마나 매력적인 서사인가.  

1888년 말의 겨울에 아를에서 벌어진 사건은 빈센트 반 고흐를 상징하게 되었다. 자신의 귀를 잘라 매춘업소의 누군가에게 선물한, 괴상한 행위는 폴 고갱을 비롯한 목격자들의 회고에 의해 위대한 예술가는 미치광이일 수 밖에 없다는 신화를 일반에게 각인시켰다.  

작가는 에피소드에 의문을 가진다. 과연 고흐는 진정 미쳐있었는가. 그렇다면 하필 귀를 자르고 매춘업소에 가서 잘린 귀조각을 선물한 심리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미쳤기 때문에'라는 명쾌한 한 마디로 지나칠 사건에 7년을 투자했다.  

일반적으로 예술가에 대한 글은 대상을 닮아 격렬하고 감성적이며 내재적인 접근이기 쉽다. 하지만 작가는 철저히 실제에 기반하려 노력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흐와 지인들의 편지는 물론, 당시의 신문기사와 공공기관의 문서들을 통해 아를에서의 고흐의 행동패턴과 반경들을 확정시켜 나간다.   

지극히 영국인다운 실증적인 추적이다. 귀를 자른 직후 고흐를 치료했던 당시 의사가 그린 그림을 발견해 여러 설이 분분한 귀를 자른 형태를 밝혀낸다. 끔찍하게도 귓볼을 남기고 귀를 잘라낸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귀를 선물한 매춘업소의 여성은 매춘부가 아니었다는 사실 역시 문서들로 좁힌 당시 시민들의 후손들과의 인터뷰로 거둔 성과였다. 그녀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업소의 식모로서, 개에게 물린 끔찍한 상처 때문에 구세주가 되려했던 고흐의 심리를 자극했던 것이다.  

귀를 자를 당시에 고흐는 분명 미쳐있었다. 가족력으로 인한 정신질환은 30대가 넘어서 발작이 빈번해졌다. 환상과 환각에 시달렸고 급기야 자신마저 파괴했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예술적 영감에 도움을 줬는가. 책에 의하면 전혀 아니다.  

평소의 고흐는 예민하고 괴팍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가족회귀적이고 얌전한 사람이었다. 예술을 위해 삶을 내던지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술과 여자를 탐하고 난폭하며 광기에 휩싸인 고흐는 어빙 스톤의 전기와 이를 영화화한 '삶을 향한 열망'이 만들어낸 왜곡된 이미지였다.  

나는 고흐를 사랑했던 동생이자 평생의 후원자였던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며 인간 고흐를 진심으로 동정한다. 완치 판정을 받았음에도 이웃에게 피해를 줄까 두려워 병원에 머물러 있길 원했던 것이나 일방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는 동생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며 폐를 끼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그의 선한 마음에서 광기를 찾아볼 수는 없다. 더구나 발작할 때에도 도스토옙스키적인, 음울한 타입으로 변했을 뿐이다. 

최종적으로 '반 고흐의 귀'는 예술을 감상하는 내 생각을 변화시켰다. 이전까지 내 나름대로의 지론은 '예술에 대한 평가는 결과물에 국한되어야 한다'였다. 결과물을 만든 사람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은 예술의 가치를 변질시킨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예술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가지각색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흐의 그림을 보며 광기를 읽었다면 옳은 느낌은 아닐것이다. 책에 의하면 발작은 그의 예술세계를 방해했으며 명을 재촉한 치명적인 걸림돌일 뿐이었다. 그래서 감상에는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물론 가쉽이 아니라 실제에 기반한 정확한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덕분에 그의 그림이 다시 보인다. 따뜻한 톤의 색감에서 프로방스의 풍부한 일조량과 고흐의 선량한 인품이, 작가가 정체를 찾아낸 초상화의 모델들에게서 조그만 도시의 소박한 일상을 엿본다. 이를 통해 고흐의 그림이 경매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사치품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었던 이가 이웃과 자연을 캔버스에 담으려 했던 과정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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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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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넥. 화이트 트래쉬. 이는 '힐빌리'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동부내륙과 남부의 백인 노동자계층을 뜻하는 단어들이 오늘날 풍기는 냄새는 그리 좋지 않다. 무식하고 과격하고 극우적이며 게으른 그들은 온갖 영상물에서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미국 대선에서 최악의 후보로 꼽혔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층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현실이며 실재하는 집단이다.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오하이오 주의 제철소 인근의 도시와 켄터키 주의 탄광촌을 오가며 자라난 작가는 힐빌리의 훌륭한 표본이다. 제철소 노동자로 오하이오에 자리잡은 할아버지 이래의 작가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들어서는 듯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남부 백인의 특성이자 자긍심이라 할 수 있는 마초이즘이나 연방에 대한 분노는 20세기에 걸맞지 않았다. 늘 차에 총을 두고 다니며 폭력을 일삼는 그들은 자신들마저 파괴했다.  

작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늘 싸웠고 그것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부모의 행태를 반복했다. 특히 작가의 어머니는 결혼과 이혼을 밥먹듯 반복했고, 급기야 약물중독자가 되어 육아는 커녕 어린 자식 앞에서 온갖 추태를 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집안에서 최초로 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었다. 이는 젊은날에서 교훈을 얻어 각성한 할머니의 헌신적인 보호 덕분이었다.  

작가가 회고하는 할머니는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소프라노스'와 '터미네이터 2'의 팬이자 총과 몽둥이를 들고다니며 쌍욕을 거침없이 내뱉는 여장부였으나 손자를 사랑했고 현명했다. 자신이 손자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손자 역시 전대의 행태를 반복하며 인생을 망칠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밴스 집안의 막장스러운 행각들은 이제는 여유스러운 작가의 회고로 때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앞서 말한 할머니의 원칙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작가를 둘러싼 힐빌리들은 부모의 한탄스러운 인생을 반복한다. 작가가 '미국에서 가장 비관적인 집단'이라 표현한 그들에게 창궐한 무기력과 좌절감은 마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듯 대를 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자수성가를 구체적이고 찬란하게 묘사해두었다. 나로서는 오글거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글을 읽는 어린 힐빌리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책을 읽으며 미국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새삼 놀란다. 러스트벨트, 즉 동부내륙의 쇠락한 공업지대의 생생한 풍경에서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들도 변화를 갈망했다. 그것이 트럼프의 당선이었다. 또한 밴스 가문의 3대가 일자리를 따라 이주하고 주저않는 양상은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과정이다.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인간에게 성장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작가의 경우 유년기에 방황하다 할머니의 헌신으로 겨우 고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가족의 노력뿐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의 위기감이 시급하다. 그들은 수대를 거쳐 서로를 망쳤다는 점을 작가는 지적하고 있으며 내부에서의 각성을 촉구한다.  

원래 자수성가 스토리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홀로 일어서는 서사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확신에 찬 설교가 그리 달갑지 않았고, 이를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정책으로 연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밴스 집안 이야기가 그 자체로 희노애락이 가득하고, 치부를 까보이는 솔직함이 좋다. 또한 사회개혁적인 화두는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으로까지 대입이 가능한 보편적인 문제제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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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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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 소설을 영상화한 동명의 영화를 예전에 봤기에 대략적인 내용을 알고 책을 펼쳤다. 나는 스포일러를 당하는 데에 별로 신경을 안쓰는 타입이기도 하다. 반전을 알고 있더라도 좋은 스토리라면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전개를 또 새롭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검은 집'은 그렇지 않다. 또한 반전이라고 하기에도 웃긴 범인의 정체도 중간에서 드러난다. 장르소설에 단련된 독자라면 대번에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남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소설의 방향은 무엇일까. 사이코패스로 주변인물들을 상해입히고 죽이며 보험금을 타먹는 여인은 스토리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를 악몽으로 그려내기에는 깊이가 모자라다.   

후반이 되면 아예 스플래셔 무비로 둔갑한다. 중년의 여인은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마냥 칼을 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사람들을 살해하고 납치하는 괴력을 뽐낸다. 아예 정체를 까발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주인공과 대치하는 씬에서는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미친 아줌마라고 해도 성인남자들을 연달아 해치우는 설정은 무리수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하나를 읽다가 접었고, 기시 유스케 역시 실망스럽다. 아무래도 일본 스릴러문학은 나와 맞지 않는 듯하다. 끊김없는 가독성 위주로 쓰여진 단선적인 줄거리와 평면적인 인물과 심리묘사는 내가 접했던 일본 스릴러들의 공통점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인간형이 내뿜는 서늘함을 접하고 싶다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책들을 한번 더 읽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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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에 대하여 - 가치를 알아보는 눈
필리프 코스타마냐 지음, 김세은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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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 책은 '미술감정사'라는 직업에 관한 것이다. 저명한 미술감정사이면서 코르시카의 아작시오 미술관의 관장이기도 한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직업이 미술사학자와도 다르고 미술상과도 다르다고 한다. 미술사학자와 미술상 사이에 위치해 있기에 이론과 현실을 겸비해야하는 미술감정사는 쉽게 말해서 탐정이나 보물사냥꾼과 흡사하다.  

책을 읽으며 알게된 것인데, 유명 미술가라 하더라도 고유의 표식을 남겨놓지 않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한다. 작품목록 따위는 남기지 않은 수백년 전의 화가들의 그림들은 어딘가에 작가미상으로 처박혀 있거나, 혹은 생뚱맞게 다른 이름을 달고 전시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대로 기법의 유사함으로 유명작으로 행세하는 경우 역시 있다. 그리고 틈을 비집고 한몫 해볼려는 위작들까지 판을 치니 미술감정가라는 직업의 등장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작가는 나를 포함한 일반인에게 낯선 미술감정가의 세계를 안내한다. 앞서 말한 혼란스러운 산더미에서 브론치노와 라파엘로의 그림을 발굴한 것이나 위작을 가려내고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폰토르모를 대가의 반열에 올린 일화들에서 작가의 직업적 자부심이 넘친다. 그럴만하다. 미술감정사는 고도의 두뇌활동과 수련과 눈썰미가 필요하다. 더구나 의뢰해오는 박물관과 콜렉터와의 완만한 관계를 이끄는 처세 역시 필수적이다.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대접받는 명예와 함께 부도 거머쥘수 있는 직업이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에 팔리는 그림의 퍼센테이지를 바로 그들이 가져간다.  

미술감정사는 묻혀있는 미술품의 진가를 발견하고 가치를 매긴다. 허나 가치가 곧 돈으로 직결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시장은 그들만의 돈잔치가 된지 오래 아닌가. 음악과 영화와는 달리 미술은 대중적인 공유의 한계가 있는 예술이다. 때문에 수집의 욕구를 당기고 원본의 희소성은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현재의 미술시장은 월스트리트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제 미술품은 금괴와 석유와 마찬가지로 재산축적의 한 도구로 쓰인다.  

물론 작가가 거론하는 르네상스 기의 그림들도 당시의 귀족들의 의뢰와 후원으로 탄생했다. 본래 예술은 잉여자본을 먹고 살고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것은 미술감정사라는 직업이 미국이 부국으로 떠오를 때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졸부들은 유럽의 전통을 원했고 무차별적으로 사들인 미술품에 가치를 매기고 분류하길 원하는 와중에 작가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직업이 만들어졌다.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책을 읽은걸까. 그런데는 글이 업계에 매몰되어 있는 이유도 있다. 작가의 전공인 피렌체 유파에 관한 사실과 자랑이 범벅된 글은 예술 본연의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 표피적이며 보편적이지 못하다. 결론을 말하면 본 책은 진귀한 특정직업의 소개에 그칠 뿐이다. 제목에서 기대한, 예술을 알아보는 안목을 길러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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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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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해석해보면 음악광 정도가 될까. 책은 음악과 뇌의 작용을 작가는 신경과 의사로서 관찰하고 진료한 기록들을 통해 의학적으로 접근한다.  

한순간에 다른 인간으로 변하는 전개의 몇몇 사례들이 소개된다. 예를 들면 음악에 관심이 없던 남성이 번개를 맞은 이후에 머릿속의 악상에 따라 작곡을 시작하고 중년의 나이에 음악계에 데뷔한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물론 극적인 내적변화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가정적이던 남성은 음악에 몰입때문에 사랑했던 아내와 이혼했다.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의 여정을 따라간 남성은 자신의 운명에 만족했다.  

또한 음악이 소리에 그치지 않고 시공감각을 동반한다는 주장들 역시 작가가 관찰한 사례들로 뒷받침된다. 이는 이미 많은 이들이 경험한 바다. 10대에 즐겨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당시의 나로 되돌아간다. 구구절절하지만 소중한 나만의 경험들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마들렌으로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마찬가지이다. 음악은 과거의 나로 데려다주는 마들렌이었으며 타임머신이란 비유는, 책에 의하면 단지 오그라드는 감성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가 있었던게다.  

한 순간에 뇌의 일부가 변질되어버린 환자와 예전의 자신을 깨우는 음악의 기능은 음악치료로 결합되었다. 수술이나 약물치료가 아닌 단지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과연 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작가는 많은 성공사례를 들며 확신하는 듯 하다. 기억상실증, 원치않는 온갖 음악이 머릿 속에서 재생되는 투렛 증후군, 잘린 부위에서 통증을 느끼는 환상지 등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으로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물론 기적은 없다. 서서히 몇년 간의 치료에 의해 악화를 막고 일상생활을 보전해주는 정도였지만 음악과 뇌에 관한 작가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충분하다.  

눈과 귀로 세상을 인지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우리가 보고 들어서 판단을 내린눈 앞의 결론은 진실인가. 작가가 소개하는 사람들은 환청에 시달리지만, 과연 그들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에 보면 뇌의 연상작용에 불과하지만, 역사상 종교지도자들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장하며 문명의 정신적 흐름을 좌지우지했다. 원숭이와 별다를 바 없었던 인간이 문명을 창조한 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해낸 인지혁명 덕분이었다고 말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일맥상통한다.

음악과 뇌의 피드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인간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종교적인 독자는 모든 것이 뇌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불가해한 뇌를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새로 보인다. 이는 실제를 무시하고 정신력을 앞세우는 꼰대적 결론과는 유사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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