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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평점 :
레드넥. 화이트 트래쉬. 이는 '힐빌리'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동부내륙과 남부의 백인 노동자계층을 뜻하는 단어들이 오늘날 풍기는 냄새는 그리 좋지 않다. 무식하고 과격하고 극우적이며 게으른 그들은 온갖 영상물에서 조롱과 경멸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미국 대선에서 최악의 후보로 꼽혔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층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현실이며 실재하는 집단이다.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오하이오 주의 제철소 인근의 도시와 켄터키 주의 탄광촌을 오가며 자라난 작가는 힐빌리의 훌륭한 표본이다. 제철소 노동자로 오하이오에 자리잡은 할아버지 이래의 작가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들어서는 듯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남부 백인의 특성이자 자긍심이라 할 수 있는 마초이즘이나 연방에 대한 분노는 20세기에 걸맞지 않았다. 늘 차에 총을 두고 다니며 폭력을 일삼는 그들은 자신들마저 파괴했다.
작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늘 싸웠고 그것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부모의 행태를 반복했다. 특히 작가의 어머니는 결혼과 이혼을 밥먹듯 반복했고, 급기야 약물중독자가 되어 육아는 커녕 어린 자식 앞에서 온갖 추태를 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집안에서 최초로 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되었다. 이는 젊은날에서 교훈을 얻어 각성한 할머니의 헌신적인 보호 덕분이었다.
작가가 회고하는 할머니는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소프라노스'와 '터미네이터 2'의 팬이자 총과 몽둥이를 들고다니며 쌍욕을 거침없이 내뱉는 여장부였으나 손자를 사랑했고 현명했다. 자신이 손자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손자 역시 전대의 행태를 반복하며 인생을 망칠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밴스 집안의 막장스러운 행각들은 이제는 여유스러운 작가의 회고로 때론 유쾌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앞서 말한 할머니의 원칙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작가를 둘러싼 힐빌리들은 부모의 한탄스러운 인생을 반복한다. 작가가 '미국에서 가장 비관적인 집단'이라 표현한 그들에게 창궐한 무기력과 좌절감은 마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듯 대를 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자수성가를 구체적이고 찬란하게 묘사해두었다. 나로서는 오글거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글을 읽는 어린 힐빌리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책을 읽으며 미국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새삼 놀란다. 러스트벨트, 즉 동부내륙의 쇠락한 공업지대의 생생한 풍경에서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었다.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들도 변화를 갈망했다. 그것이 트럼프의 당선이었다. 또한 밴스 가문의 3대가 일자리를 따라 이주하고 주저않는 양상은 사회학적으로 흥미로운 과정이다.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인간에게 성장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작가의 경우 유년기에 방황하다 할머니의 헌신으로 겨우 고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가족의 노력뿐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의 위기감이 시급하다. 그들은 수대를 거쳐 서로를 망쳤다는 점을 작가는 지적하고 있으며 내부에서의 각성을 촉구한다.
원래 자수성가 스토리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홀로 일어서는 서사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확신에 찬 설교가 그리 달갑지 않았고, 이를 사회전체를 아우르는 정책으로 연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힐빌리의 노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밴스 집안 이야기가 그 자체로 희노애락이 가득하고, 치부를 까보이는 솔직함이 좋다. 또한 사회개혁적인 화두는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으로까지 대입이 가능한 보편적인 문제제기들이었다.